신앙을 추상으로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교리의 정확도를 따지고 들고 성경의 일련의 내용이 이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거부한다고 합니다. 언뜻 그들의 이성적 분별은 참으로 대단한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그들이 어쩌면 자기 스스로도 제대로 추스리고 있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말이지요.
저는 남미에 8년동안 선교를 다녀 왔습니다. 때로 남미라는 곳을 '정보'로만 따지고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볼리비아는 어떤 나라이고 정치 상황은 어떻고 인구는 몇 명이며 환경적 요인은 어떤 것이 있는지와 같은 어디서 듣고 배운 정보들을 조목 조목 나열합니다. 하지만 그는 제가 아는 호르헤를 알지 못하고 로드리게즈의 팍팍한 삶을 이해하지 못하며 야마가 뱉어 놓은 초록색 침냄새도 모릅니다. 삶은 생생히 살아있는 것이고 구체적인 현장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와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꼭 어딘가를 가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의 삶 속에서 내가 아는 신앙의 기초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차를 운전하는 법은 자동차 메뉴얼을 들고 와서 파고든다고 익혀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차 안에 앉아서 핸들과 페달을 조작하며 조금씩 차를 움직여 보아야 아는 것입니다.
옛 성인들은 신앙에 대해서 많이 알아서 실천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앎의 환경으로 친다면 오늘날이 더 활짝 열려 있습니다. 과거에는 성경 하나도 제대로 구비하지 못하고 신앙을 살아간 사람들이 허다하니까요.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선하심을 올바로 믿고 실천하는 것으로도 기초는 충분합니다. 필요하다면 더 배워 나가면 되지만 실천하는 데 있어서 모자랄 일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양심이 있는 이상 몰라서 신앙생활을 못하는 일은 없습니다. 내가 아는 선을 하나씩 실천해 나가고 좋은 덕으로 나를 채워 나가면서 나에게 허락된 능력에 따라 부족한 것을 배우고 익혀 나가면 됩니다. 우리는 와서 보는 것으로 신앙을 시작해야 합니다.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삶의 현장에서 신앙을 체험해 보게 되면 비로소 우리는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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