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여인과 용 이야기




묵시록은 예언의 책입니다. 예언은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평소에 운동을 안하고 음식을 잘 챙겨먹지 않는 사람의 건강은 어떻게 될까요? 망가질 것은 뻔한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술까지 과하게 마시고 운전까지 한다면 훗날 무슨 일이 있어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예언은 이를 보다 넓게 확장하고 나아가 하느님의 뜻을 우리에게 드러냅니다. 즉 우리의 구원과 연계되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실제로 일어날 일을 우리에게 전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예언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고 우리의 실제 삶과 연계해서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


태양은 낮을 비추는 밝은 빛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가장 밝은 빛이신 하느님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감싸여 계신 분이시고 이는 천사의 인사에서도 나타납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이여' 우리 역시도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훗날 하늘 나라의 잔치상 앞에서 입고 있는 '예복'이 될 것입니다. 은총은 믿음을 통해서 얻고 따라서 우리가 지닐 흰 옷은 우리의 믿음의 옷이자 하느님의 은총의 옷이 될 것입니다. 믿는 이는 은총 안에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달은 어둠을 밝히는 빛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빛과 어두움이 공존하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런 어두움 가운데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빛을 전하는 존재는 바로 교회입니다. 성모님은 교회에 발을 딛고 서 계십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어머니로서 교회를 돌보십니다. 우리도 이 지상을 살아가는 동안 교회에 머물러야 합니다. 비록 태양처럼 흠없고 밝은 빛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식별력을 선물받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교회가 있기에 아직도 우리는 신앙의 삶을 살아갈 힘을 얻는 것입니다.


별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이정표의 역할을 합니다. 수많은 성인과 성녀들의 삶의 모범은 때로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빛이 되었고 마치 뱃사람이 하늘을 보고 길을 찾듯이 그들에게 삶의 지침을 내려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도들은 사람들의 목자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 하느님께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도들의 후계자들인 주교들과 주교를 돕는 사제단은 여전히 길잡이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또한 수많은 성인들은 고유한 카리스마로 수도 공동체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는 수많은 수도 공동체들은 세속에 신음하는 이들에게 잔잔한 빛을 던져주며 길잡이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산통은 기쁨을 예비한 고통입니다. 교회는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의 나라인 하늘 나라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신앙 안에서 영원한 탄생을 준비하며 누구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무의미한 고통이 아니라 분명한 희망을 지닌 고통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늘 나라에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반대편을 조금 살펴봅시다.


크고 붉은 용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존재이고 폭력을 행사하는 존재입니다. 그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들을 복종 시킵니다. 이는 세상의 힘, 즉 권력과 명예와 돈을 의미합니다. 그런 세속 권력은 사람들을 죽음의 두려움으로 복종시키고 괴롭힙니다.


그런 용에 달려 있는 일곱 머리와 열 뿔, 머리마다 씌워진 관은 바로 지적인 영리함과 세속적 권능, 세속적 명예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신앙인이 비둘기처럼 순박하고 뱀처럼 영리하라고 해도 세상의 영악함 앞에 둔감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은 자신의 이성적 사고를 최대한 활용하여 자신의 뿔의 권능을 지켜 나갑니다. 세상 안에서 아귀다툼을 하는 모습을 조금만 지켜봐도 이 날이 선 싸움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 안에서 얻어지는 명예에 모든 것을 걸기도 합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이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얻어지는 은총이나 영원한 생명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 용은 꼬리로 하늘의 별의 삼분의 일을 휩쓸어 버립니다. 순진한 신앙인은 세속의 유혹에 빠져 땅으로 던져지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지 않으면 유혹은 순식간에 우리를 낚아채 버릴 것입니다. 하늘의 별이던 이들도 떨어지는 판인데 일반 사람들에게 그 유혹은 더욱 강하게 펼쳐질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환속하는 시대입니다. 용은 사실 모든 시대를 통틀어 이런 타락을 이끌어 왔습니다. 헌데 그것도 자신의 꼬리로만 한 일일 뿐입니다. 아직 본론은 시작도 하지 않은 셈입니다. 하느님께서 한계를 설정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보호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어쩌면 거의 대부분 용의 공격에, 즉 세속의 공격에 휩쓸려 갔을 것입니다.


이 용은 해산 하는 여인 앞을 지켜보면서 그 아이를 삼켜 버릴 작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용의 영리함과 교묘함보다 하느님의 뜻과 은총이 우선합니다. 결국 아이는 태어났고 여인은 광야로 달아나 주님이 마련한 처소에 들어갑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 여인의 승천을 기념합니다.


칼에 칼로 맞설 수 없습니다. 그러면 둘 다 멸망하게 됩니다. 죄악에는 은총으로 맞서야 합니다. 우리 역시도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광야에 몸을 피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속의 유혹과 공격에 같은 세속적 방식으로 대응하려고 하면 우리에게 남은 운명은 멸망 뿐입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