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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끌어당기는 것




“어머님을 두고 돌아가라고 저를 다그치지 마십시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고,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저의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룻 1,16)


우리는 신앙인이기에 '하느님'이라는 분을 알고 있고 그분을 사랑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여전히 요원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나름으로는 서로 사랑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사실 처음부터 하느님을 대뜸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다들 사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을 주변에 두고 있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룻기는 바로 그런 상황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나오미의 두 며느리는 이방민족 출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과부가 되어 스스로의 삶의 여정을 선택할 시간이 되자 한 며느리인 오르파는 자신의 고장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룻은 어머니 곁에 남기를 결심합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을 테지만 분명한 것은 룻은 자신의 시어머니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일종의 결실로 룻은 시어머니의 삶의 영역을 모두 받아들인 셈입니다. 그리고 룻은 이어지는 내용에서 보아즈를 남편으로 맞아들이고 이 보아즈는 훗날 다윗 임금의 할아버지가 되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에게 매료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지닌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실 신앙을 전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삶을 살아가면서 다른 이들 앞에서 그 삶의 모범을 드러낼 때에 그들은 우리를 사랑하게 되고 나아가 우리가 지닌 신앙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의 현실 앞에서 우리는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런 매력으로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끌어 들이고 있을까요?


시골 본당에 부임한 이후로 저를 조금은 안타깝게 한 일들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건 가톨릭 신자인 어르신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 가족의 반대로 가톨릭 장례를 해 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슬하에서는 그나마 주일을 어기지 않던 자녀들이 도심지로 나가게 되면서 신앙을 챙기는 일이 없게 되고 그러다가 점점 신앙에서 멀어져 심지어는 부모의 장례 마저도 교회의 문을 두드리지 않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타인을 신앙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부모의 신앙이 자녀에게 전달되는 것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것마저도 위태로운 것이 교회의 한 단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앙을 성실히 살아가는 이들은 타인에게 영혼의 매력을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이끌린 이들은 하느님의 거룩한 대전 앞으로도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용기를 잃지 말고 우리가 지닌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더욱 뜨겁게 만들어 내 주변의 사람들도 신앙으로 이끌어 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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