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2주 토요일
"되찾음"의 기쁨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가 간절히 그것을 찾다가 마침내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의 기쁨이란
세상 그 어느것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입니다.
특히나 잃어버린 것이 더 소중하고 귀한 것이면 그 기쁨은 더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둘째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기쁨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하지만 오늘 잃었다가 되찾은 이는 그저 아버지 만이 아니라
둘째아들 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째아들로서는 모든 것을 잃었다가 모든 것을 되찾은 셈이기 때문입니다.
헌데 첫째아들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어째서 첫째아들은 이 기쁨에 동참할 수 없는 걸까요?
1) 첫째아들은 동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동생이 돌아와도 전혀 기쁘지 않았던 것입니다.
2) 반대로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관심과 사랑'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뻐하기 보다는 도리어 화가 난 것입니다.
3) 첫째 아들이 실제로 잃은 것은 자신의 내면의 사랑입니다.
실제로는 이를 가장 슬퍼해야 하고 되찾아야 하는 데,
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환대에 질투가 나서 자신이 정작 잃어버린 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1) 동생을 잃지 않은 첫째아들.
무언가를 잃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느 관계를 상실하기 위해서는 그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첫째 아들은 자신의 형제인 둘째 아들을 사실은 '형제'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형제보다는 '라이벌'이나 '유산을 빼앗길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우리의 혈육을 어떤 마음으로 보고 있을까요?
나아가서 우리 신앙 공동체의 모든 형제들을 어떤 마음으로 보고 있을까요?
더 넓게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을까요?
급한대로 피를 나눈 한 가정 안에서만 봐도
때로 우리는 같은 형제에게 독기어린 시선을 보내곤 합니다.
왼손 손목에 시계를 찼다고 해서 오른손이 질투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시계를 찬 기쁨에 온 몸이 같이 기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타인의 기쁨을 질투어린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이 갈라섬은 범위가 확대될수록 더 골이 깊어져서
우리는 '형제'라는 생각을 좀처럼 갖지 못하고
철저히 '너와 나'로 갈라서고자 합니다.
가톨릭이 가톨릭인 이유는 '보편됨'의 성격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모시고 있고,
우리 모두는 한 형제, 아니 한 몸의 지체들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2) 잃었다고 착각하는 아버지의 관심과 사랑
때로 은총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이는 이들이 등장합니다.
신심이 있고 열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괜시리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두배나 세배로 더 받고 있는 것 같고,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도 그들에게만 내린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오상을 받은 비오 신부님은 하느님의 은총을 수십배 더 받고 있는 걸까요?
하느님의 은총은 모두에게 똑같이 내립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비와 같아서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내립니다.
절대로 잊지 맙시다.
하느님의 은총은 모든 이에게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쪽입니다.
같은 미사를 드려도 그 미사에 온전히 동화되는 사람이 있고
미사에 와서도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 한 번을 드리더라도
그 기도문에 온 마음을 집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저 건성건성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국 여러분의 몫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오늘 복음의 아버지의 사랑은 모든 아들들에게 똑같습니다.
하나도 제외되는 이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그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달린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시선을 타인에게 고정하고 그들이 더 많이 받는 것처럼 보이는 은총을 질투하기만 한다면
여러분은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이미' 받은 은총들에 감사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은총을 넘치도록 받은 이들입니다.
3) 실제로 잃은 것.
오늘 복음의 일화에서 사실 예수님께서 더 강조점을 두고 가르치고 싶으셨던 이는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나, 회개하고 돌아온 아들이기보다도
집에서 멀쩡히 머물다가 둘째 아들이 돌아온 것에 도리어 화를 내는 첫째 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에서 이런 유형의 수많은 이들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툭하면 '저런 사람은 쫓아내자'는 이들,
곧잘 '규정을 강화하고 실한 것만을 골라내자'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랑을 가르치는 교회 안에서 정말 열심히 일하면서
도리어 사랑은 메말라버린 딱한 이들입니다.
자신의 사랑을 넓히기 위해서 봉사를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교만을 강화하기 위해서 애를 쓴 꼴입니다.
차라리 일이 안 되더라도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낫습니다.
절름거리며 걷더라도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가
자신을 혹사하려고 작정한 사지 멀쩡한 사람보다는 낫습니다.
보다 덜 중요한 것을 위해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잃게 된다면
차라리 그 일은 하지 않는 게 낫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일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우리가 하는 일들은 때가 되고 필요하면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그 안에서 '사랑'의 열매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 보내진 이유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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