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詩的) 아름다움. 시적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같이 기하학적 아름다움 또는 의학적 아름다움을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기하학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증명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의학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치료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가 목적으로 삼은 즐거움이 무엇으로 성립되었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모방해야 할 그 자연스러운 모형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모르기에 사람들은 기묘한 표현들을 지어내다. <황금 세기, 현대의 경이, 숙명적인> 등등. 그리고 이 특유한 말들을 시적 아름다움이라 부른다.
그러나 하찮은 것들을 거창한 말로 표현하는 것으로 성립된 이 모형에 따라 한 여인이 치장한 것을 상상하는 사람은 거울과 구슬로 온통 몸을 휘감은 한 아름다운 여인을 볼 것이며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시의 즐거움보다 한 여인의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더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치장한 여인도 찬양할 것이다. 그리고 이 여인을 여왕으로 착각하는 마을도 적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이 모형에 따라 지어진 시를 <마을의 여왕>이라 부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파스칼, 팡세, 이환역, 민음사(2003), p.506-507.
과거 신학교에서 1학년 후반기 때에 '말'이라는 문학 동호회에 들어간 적이 있다. 한창 팔공산 중턱의 한티의 맑고 순수한 자연 안에서 생활하면서 감수성을 최고조로 발달시켜 짧은 글이나 시를 적곤 했었기에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이 동호회에 들어갔다. 헌데 내 시를 내어놓는 순간 사정없는 칼춤이 벌어졌다. 서두부터 시작해서 말미까지 선배들의 사정없는 냉철한 비판의 말에 내가 본래 의도했던 뜻은 공중분해 되어 버리고 결국 내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괴물같은 결과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 길로 그 동호회를 나와 버렸고 더 이상 시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제와 돌이켜 보건데,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문학의 아름다움을 나누려는 신출내기 문학인에게 학술 세미나에서나 쓰는 신학과 철학의 칼날을 가져와서 도려내려 하다니 정말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나의 시라는 생선은 죽어 버렸고… 그와 더불어 글에 대한 내 감성도 한풀 기가 꺾였다. 파스칼의 이 글을 읽으면서 옛 기억이 되살아났고, 다시 힘이 생겨나는 것 같다. 나는 아름다운 여인의 그 아름다운 자체를 관조하는 이가 되려고 한다. 그럼 세상의 모든 문학들은 나의 친구가 되어 줄 것이다. 글들아 오너라 나와 함께 춤을 추자꾸나. 다시 찾은 이 기쁨을 이제는 쉽사리 빼앗기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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