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매일 양식을 가져다 바치는 우리의 몸은 언젠가 파멸할 존재입니다.
아끼고 가꾸고 근육을 만들고 아무리 노력해봐야
늙어가고 병들어가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이 땅의 육체라는 것에 마련하신 섭리입니다.
그렇다면 밥을 먹이지 말아야 할까요?
어차피 죽을 거면 쓸데없는 노력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게 아니라는 건 여러분들도 이미 아는 사실입니다.
어떻게든 살아있는 동안은 살려야 합니다.
그것 또한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당하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것을 두고 마음쓸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때가 되면 시기를 거르지 않고 먹일 것을 먹이면 됩니다.
그러면 육은 잠잠해지고 우리는 그렇게 활기를 회복한 육과 더불어
천상적인 것을 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경우에 우리가 느끼는 '죄책'은
이 사라지게 될 '육'과 관련된 것이 많습니다.
특히나 '성(性)'은 더욱 민감한 문제로
우리는 지나치게 거기에 집중해서 그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그저 이 단어가 나오기만 해도 경계를 하게 되는 문화적 배경에서 자라온 셈입니다.
언젠가는 파멸할 것에 매달려 있는 그 자체가 '죄'라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먹는 걸로 양심의 가책을 받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조금 과식을 해서 몸에 무리가 갈 정도라면 모를까
그게 아니고서는 먹는 걸로 죄책을 느끼진 않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의 의지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의지는 여러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배경들 속에서 훈련 받습니다.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법'을 어겼다고 힘들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법'을 배워 알기에 그에 상응하는 힘든 마음도 생겨나는 셈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법'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알던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깨달을 수 있다면
여러분은 왜 창녀와 세리가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되는지도 알 수 있게 됩니다.
몸에 꼭 조이는 옷을 입고 있으면
그 자체로 피가 통하지 않아서 정상적인 생활 범위 내에서도 불편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인간의 약한 피부를 보호하려고 하느님께서는 가죽 옷을 주셨는데
인간들은 그 옷에 지나친 장식을 더해서 원래 용도를 벗어나 인간을 옥죄기 시작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제가 하는 비유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율법에 대해 지니셨던 마음을 이해하실 수 있으려나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가르치셨기에
저 역시도 비유를 쓸 뿐입니다.
가리워진 이에게는 영원히 가리워져 있을 것이고
찾는 이에게는 드러날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