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을 통해서 관계는 시작이 되지만,
어떤 형태로든 '대화'가 없다면 그 관계는 와해된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스치며 살아간다.
그저 버스에만 앉아 있어도 창밖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지나가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과 그저 스칠 수 있는 것은 '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화에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는데
사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정보의 주고받음은 대화라고 보기 힘들다.
인터넷 기사들을 보라, 우리는 그 기사와 대화하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가 거기 기사를 남긴다고 해서 대중들과 대화하는 것도 아니다.
대화는 두 사람이 마주하고, 진솔한 것을 나누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는 아무리 가까이 산다고 해서 그 거리가 하등의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다.
가까이 살면서 오히려 남처럼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한 사람과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당신은 그 사람의 마음에 참여하는 셈이고,
당신의 영혼을 확장시키는 셈이다.
관계가 집착으로 바뀌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관계'마저도 소유하려고 들어서
한 사람의 마음이 나에게로 집중하게 하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그 사람을 온전하게 소유하려면
그 사람이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 놓여 있어야 한다.
나에게 종속되는 순간 그의 특색은 사라져버리는 셈이다.
'아 저 신부님은 나만 바라봐 주었으면…'
'아 저 친구는 나만 생각해 주었으면…'
이런 바램은 인간적인 욕구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지만
이런 바램을 구체화하려고 노력해서는 안된다.
그 사람을 그 자리에 두라.
그럴 때에 당신은 그의 향을 즐길 수 있다.
그 꽃을 그 자리에 두라.
꺾는 순간 꽃은 시들기 시작한다.
진솔한 대화가 그리울때면
나는 '기도'를 권한다.
주절주절 정해진 양식을 외우는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에게 나를 열어보이는 초자연적인 대화…
대화가 '말마디'로 이루어진다고만 생각하는 이들에게 이 대화는 말도 안되는 것이지만
대화라는 것이 그와 나의 눈짓 한 번, 그가 나를 생각해서 뿌린 향수 내음,
그가 나에게 짓는 표정으로도 드러난다는 것을 캐치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대화 역시도 알아챌 수 있으리라.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의 고백을 하고 계시는지 모른다.
당신이 오늘 숨을 쉰다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사랑의 증거라는 걸 깨달을 때에
당신의 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는 셈이다.
숨쉬듯이 하느님과 대화하라.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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