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5주 주일
그 심판의 척도를 내면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척도로 스스로를 심판하게 됩니다.
예컨대 자신의 자녀가 거짓말을 한다며 그 자녀를 때리는 부모는
'거짓말엔 폭력을 겸한 징벌'이라는 구도가 내면에 있는 셈이고
늘 그 기준에 스스로를 비춰 보아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타인에게 더욱 엄한 규정을 들이댈수록
우리 스스로의 내면에도 더욱 엄한 규정을 쌓아놓는 셈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는 '명백히' 죄를 지은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여인을 자신들의 법에 따라 처벌하기를 원합니다.
그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그 법이 틀어박혀 있는 셈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작업은,
그 내면에 틀어박힌 법에 각자 자신을 비춰보게 한 것 뿐이었습니다.
"스스로를 단죄할 용기를 지닌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물러갔고,
오직 유일하게 죄 없으시고 따라서 죄를 심판하실 수 있는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누구이길래 내 이웃을 심판한단 말입니까?
당신은 누구이길래 지금 그를 미워합니까?
대단한 용기입니다.
당신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지금 스스로를 단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저지를 불법을 참아 견딜 수 없다면,
지금 당신이 미움으로 저지르는 불법 역시도 본인 스스로 심판하는 꼴입니다.
당신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저는 그럴 용기가 없어서
차마 누군가를 단죄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심판은 하느님에게 맡기고
당장은 그를 용서해야 하겠습니다.
아, 표현을 잘못했군요.
그건 '용기'가 아니라 '무모함'입니다.
가장 무거운 망치를 들고 내 손등을 내리찍을 무모함은 저에게는 없습니다.
망치를 솜방망이로 바꾸던지,
아니면 아예 칠 생각을 말지요.
그러니 어서 용서하십시오.
아니면 적어도 '정의'라는 핑계로 가장 사악한 복수를 꾸미지는 마십시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