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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와 이성


사제로서 얼굴이 예쁘장한 아가씨를 만날 때에는 각별히 조심할 필요가 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이성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심정적으로 먼저 동화된 것을 바탕으로 이성이 그 이유를 찾기 때문이다. 이성은 일단 먼저 기분이 좋아진 걸 바탕으로 그 기분이 좋아진 이유를 찾고 그 반대로 기분이 나빠진 걸 바탕으로 기분이 나빠진 이유를 찾기에 주력한다.

이쁘장한 사람의 경우 우리 사제들은 기본 심정적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따라서 그녀가 보통 사람처럼 드러내는 신심은 몇 배나 확대되고 그 반대로 그녀가 가진 결점은 축소되게 된다. 그렇게 그 사람을 자꾸 마주하고 싶어지게 되고 자기 딴에는 그녀를 영성적으로 도와주는 좋은 일을 한다고 착각하면서 실제로는 그녀의 미모를 즐기려고 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그녀 당사자에게도 좋을 수가 없는 것이 자신이 지닌 결점을 분별하고 찾아서 도와줄 사람이 필요한데 이미 심정적으로 기울어진 사제들은 그녀의 결함을 축소하고 장점만 부각시켜 드러내기 때문이다.

사제라는 직분 때문에 피치 못하게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고 만나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특히 인물이 좋은 사람을 만날 때에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자신의 심성을 잘 살피고 조금이라도 흐트러짐이 느껴질 때에는 그런 여성들은 주변에 알고 있는 신심 있는 나이 지긋한 경건한 수녀님에게 맡기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나 그녀를 위해서나 더 나은 방법이다.

농담처럼 하는 말이긴 하지만, 이쁜 여성을 한 번 만날 때에는 그렇지 않은 여성 10번을 만날 각오를 하고 만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내 마음은 그리로 기울어진 상태이다. 그리고 이는 사실 사제만이 아니라 모든 남성들에게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반 남성들은 한 이성만 책임지면 되기에 파급 효과가 없지만, 사제는 수많은 영혼들을 돌보아야 하기에 그 책임이 적지 않은 셈이다. 행여 그렇게 마음이 완전히 넘어가 버리고 나면 나중에 아무리 핑계를 대어 보아야 소용이 없다. 그러니 신부님들은 지금의 마음을 잘 살펴보시기를 권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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