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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영광

사순4주 목요일

우리는 내심 누군가의 지지와 응원을 기다립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로부터의 사랑을 늘 기다려왔습니다.
부모가 이런 걸 잘 한다고 하면 그걸 더 잘 하기 위해서 노력했고
저런 걸 싫다고 하면 그걸 하지 않도록 노력해 왔습니다.

나아가서는 친구들이 이런 걸 잘 한다고 추켜 세우면 그걸 더 잘 하려고 했고
저런 건 왜 하느냐고 하면 그런 걸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사회에 들어가서는 직장 동료들과 상사들의 의견이 중요해집니다.
그렇게 우리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람들의 의견에 맡겨 왔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우리 내면이 진정으로 원하는 걸 잃어갔습니다.

사회가 제시하는 성공을 이루려고 노력하지만 그 끝은 도저히 보이지를 않고
언제나 우리는 뭔가 '부족한' 사람으로 남는 기분입니다.
꽤나 열심히 달린 것 같은데 늘 제자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정해놓은 것'은 진정 우리가 되어야 할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약삭빠르게 제 몫을 챙기는 사람을 현명하다고 가르칩니다.
세상은 1등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그러기 위해서는 때로는 남들을 짓밟는 것 정도는 괜찮다고 합니다.
세상은 더 많이 가져야 한다고 하고, 더 나은 무언가를 구입해야 하며 더 많이 배워야 한다고 합니다.
이렇듯 세상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사실 '환상'입니다.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내면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진정 나의 내면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정해놓으신 길은
세상이 가리키는 방향과는 전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이 되면 됩니다.
우리는 '슈퍼맨'이 될 필요가 없고,
'빌 게이츠'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나 '마진우 요셉'일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쓰시려고 이 땅에 부르신 나 자신이 되면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길보다 훨씬 낮은 곳에 있는 것이 일반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미친듯이 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지금 있는 곳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됩니다.

타인의 인정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십시오.
그리고 '하느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이 마련하신 우리 자신의 모습 그대로가 될 때에
즉, 당신이 정해 놓으신 가장 좋은 도구가 될 때에
우리를 온전히 인정해 주십니다.

컵에 물을 따라 마시는 데에 손잡이에 작은 흠이 있다고 해서 마시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컵 속에 다른 것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면,
컵을 온통 다른 페인트로 칠해 두었다면
그 역한 냄새는 도리어 컵의 본래의 의도를 잃어버리게 만들고 맙니다.

여러분의 본래의 위치는 어디입니까?
지금 있는 그 곳입니까?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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