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을 싫어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던지
아니면 내면에 뭔가 정상적인 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은 사람이다.
누구든지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쁜 사람, 잘 생긴 사람을 선호하는 경향을 비난할 순 없다.
하지만 본인이 지금 느끼는 아름다움에 대한 본질을 숙고할 필요는 있다.
사라져버릴 아름다움을 사랑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사랑에 빠졌다가
그 아름다움이 사라질 때에 환멸을 느끼는 사랑은
지극히 피상적인 사랑일 수밖에 없다.
특히나 배우자를 찾는 젊은 사람들은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해서 쉽사리 혼동한다.
상대의 외모, 상대의 재력, 상대의 기질과 성격은
절대로 영원할 수 없다는 걸 잊으면 안된다.
따라서 보다 깊이 숨어있는 진정한 아름다움인 '선한의도'와 '진솔한 마음'을 찾아야 하는데
많은 경우 이는 가려져 있다.
하지만 절대로 볼 수 없는 건 아니라서
그 사람과 잠시만 일상을 나누어보면 금세 드러나게 마련이다.
얼굴만 번지르르하게 해서 늘 자기의 외모를 중시하고 그 반대인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
툭하면 누군가를 비난하는 사람,
모든 일에 투덜대고 부정적인 사람…
그 사람과의 하루의 데이트 중에 미묘하게 드러나는 부분들이다.
극장에 가서 표를 살 때, 음식을 주문할 때, 길을 걸을 때, 이야기를 나눌 때 반드시 드러난다.
내면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과 (감정적인) 사랑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젊은 시절의 불과 같은 사랑은 그 모든 걸 무색하게 하고
마법처럼 그 사람을 완벽한 나의 이상형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사랑에 빠졌다면,
이미 지닌 사랑을 '완성'시키려고 본인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부족함을 메꾸고 치유한다.
정말 사랑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모자람을 치유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다.
정상적인 가정이라고 아이들이 무조건 정상이고,
이혼 가정이라고 아이들이 무조건 엇나가란 법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완벽하지 못해서
이든 저든 부족함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상대를 고르고 골라봤자 그는 어떤 식으로든 부족함과 미흡함을 지니고 있는 것이 일반이다.
그렇다면,
'나의 사랑을 키우는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우리가 지닌 '신앙'이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예수님께 진정으로 가까이 다가서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완성시키기 때문이다.
초월적인 신앙이 없는 혼인은
언제나 긴장의 연속일 수 밖에 없고,
언제나 '전쟁과 사랑'일 수 밖에 없다.
그 수레바퀴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신앙적인 사랑을 배워야 한다.
천지신명에 따라 반신 불구로 목숨만 붙어있는 배우자를
침대 곁에서 수십년을 수발하는 그런 삶을 살아갈 준비를
지금부터 갖춰 나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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