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손에 컵을 하나씩 들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앞에는 그 컵에 음료를 따라줄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누구는 컵만한 병을 들고 있고, 누구는 조금 더 큰 주전자를, 또 다른 누구는 음료 공장에서 최종 생산물이 나오는 호스를 들고 있다.
사람들이 지닌 컵이 작을 때에는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모두 비슷한 결과를 가져온다.
하지만 사람이 지닌 컵이 점점 더 커질수록 결과는 영 딴판이 된다.
컵이 양동이만해졌을 때에는 이미 작음 음료수병을 들고 있는 사람의 음료수가 끝나 버리고 만다.
컵이 큰 대야만해지면 주전자를 들고 있던 사람의 음료도 바닥이 나 버린다.
하지만 컵이 수영장 크기가 되었을 때에는 오직 호스를 들고 있는 사람의 음료만이 그 수영장을 채우고도 넘치게 될 뿐이다.
영적인 삶을 시작하는 초심자들에게
모든 사람의 조언은 다 비슷비슷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영적인 품이 넓어지면서부터는 심한 갈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미 손에 든 컵이 커져버려서 이런 저런 소소한 것들로는 목마름을 채울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결국 우리가 다가서야 할 분은 '하느님' 뿐이게 된다.
그 전까지 우리가 의지해 오던 많은 것들을
때가 되면 과감히 버릴 각오를 다져야 하는 것이다.
최종적인 상태란 어떤 것일까?
더 이상 '컵'을 들고 있지 않는 상태가 우리의 최종적인 상태일 것이다.
뭔가를 더 이상 받는 상태가 아닌,
호스의 한 부분이 되어 버리는 상태.
당신께서 원하실 때면 언제나 당신의 은총이 나를 통해 흘러내리게 두는 상태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그렇게 되겠다고 작정해서는 안된다.
아직은 우리가 가진 컵에 음료를 받을 시기이고,
그 컵을 늘릴 시기이다.
우리가 호스가 되는가 마는가는 사실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땅에 숨을 쉬고 살아가는 동안
호스가 되는 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건 전적으로 하느님에게 달린 문제이다.
지금은 컵을 늘리기에 힘을 쓰자.
언제 컵을 치울 수 있느냐고?
그 걱정을 하는 자체로 당신의 컵은 유지되는 셈이다.
뭔가를 인식하는 이상 그 대상은 이미 내 마음 속에 있는 셈이니까.
당신이 컵이고 자시고 아무런 생각도 않고
다만 당신 앞에 드러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할 때,
비로소 당신은 하느님의 손 안의 도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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