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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기

지금까지 잘못 생각해 온 것이 있었다. 하느님에게 다가서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꾸준히 질문해 왔었다. 하지만 이 생각이 나의 엄청난 착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하느님께 다가가기 위한 첫 걸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같은 이야기를 했음에도 내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여전히 '뭔가 해야 한다'고 집중적으로 교육받아 온 나의 과거의 찌꺼기 때문이리라. 무언가 하겠다는 의도 안에서 우리는 좋은 것들을 찾아 나서긴 하지만 장인은 도구를 연마하지 않고는 일을 시작하지 않는 것처럼 먼저는 우리 내면의 흐름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고 그것을 위해서는 지금 하고 있는 수많은 것들 중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는 셈이다.

어제 페이스북을 놓았다. 사람들을 가르치겠다는 신념 속에서 알게 모르게 내어 바치고 있었던 나의 시간과, 명예에 대한 욕구를 내려놓은 셈이다. 나아가서 형제들과의 삶 속에서 나는 또 많은 것들을 내려놓을 작정이다. 악마는 우리 안에 미묘한 목소리를 집어넣어서 '좋은 것'을 추구한다는 미명 하에 자꾸 불화를 일으키고 마음을 어지럽힌다. 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놓을 것인가 하는 것은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우리 공동체의 삶 속에서도 나는 내려 놓아야 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 중에 결국 내려놓게 되는 것은 '나의 의지'라고 생각한다. 내가 무언가를 해 보려던 그 의지를 조금씩 조금씩 내려놓는 셈이다. 그리고 그 비워진 공간 속에 무엇이 채워질 것인지는 분명하다. 공허로 남아있을 순 없기 때문이다. 내 의지의 내려놓음. 이는 상당한 시련이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초컬릿을 먹고 싶다는 아이에게 쓴 약을 먹이려는 엄마와 같은 심정이다. 나의 의지는 여전히 육에 물들어 있고 편안함과 쉬운 것들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자라나야 할 때이고 십자가를 져야 할 때이다. 주님의 의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그분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 하루 나에게 다가오는 십자가를 잘 분별하고 그것을 지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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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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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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