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물 마셔." 라고 하면서 물을 직접 던져주는 사람은 없다. 뭐든 그릇에 담아주게 마련이다. 물은 담기는 그릇에 따라 이 모양도 되고 저 모양도 된다. 물을 마시기에 편한 그릇도 있고 불편하지만 어떻게든 물은 담기는 그릇도 있다.
가톨릭은 '사랑'이라는 하느님의 생수를 담는 훌륭한 그릇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톨릭만이 그 물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없다는 건 우리가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는 바이다. 절대자 앞에서 올바른 양심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구원에서 제외될 수 없다. 그들은 제 나름의 그릇에 물을 담고 살아가는 셈이다.
나는 왜 가톨릭이냐고 묻는다면 내가 자라온 토양이기 때문이고 나에게 그 물을 수월하게 전해준 그릇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이 그릇으로 물을 마시라고 권한다. 내가 직접 마셔 보았는데 마시기에도 편하고 좋더라고. 하지만 강요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누군가는 자기 그릇이 더 아름답고 이쁘다고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니까. 보다 중요한 건 '물을 마시는 것'이지 그 물을 어떤 그릇에 담는가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인 셈이다.
그릇만 이쁘게 꾸미고 물이 메말라 있는 상태... 매너리즘에 빠진 종교인의 모습이다. 물을 마시지 못하면 그릇이 아무리 이쁜 들 소용이 없는거다. 가톨릭의 보화와 같은 성체성사와 그 밖의 성사들, 전례, 여러 제도들은 그 안에 사랑이 담겨 있을 때에 찬란한 빛을 발한다. 하지만 하느님은 돌들에게서도 아브라함의 후손을 일으키실 수 있다. 성지주일 복음처럼 사람들이 외치지 않으면 돌들이라도 외칠 수 있는 셈이다. 우리가 가진 것이 교만의 원리로 작용한다면... 그건 오히려 사랑에 반대되는 길을 걷는 셈이다.
사랑하자... 그리고 그 같은 사랑을 먹고 모두가 하나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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