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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과 외면

병원에 한 사람이 찾아옵니다. 술을 지나치게 먹어 간이 아프다고 합니다. 의사는 약물 처방을 하고 다음 약속을 잡습니다. 그리고 다음주에 그 사람이 돌아옵니다. 헌데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의사는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이 증상에 이 약이면 일주일이면 낫고도 충분한 시간인데 왜 낫지 않는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온갖 검사를 시작합니다. 엑스레이며 CT 촬영이며 MRI까지 찍게 합니다. 피도 뽑고 초음파도 찍어 봅니다. 그러나 이상합니다. 그 어디에도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제서야 의사는 감을 잡습니다. 문제는 그의 몸에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의 영혼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일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영적인 이유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영적인 이유는 '선'과 '악'으로 양분됩니다. 선을 추구하면서 세상에서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악에 기대서 세상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내면은 흔히 감추어지고 우리는 외견으로 평가 받습니다. 더러운 거래를 마주해 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세속적으로 힘있으면서 영적으로 타락한 행위인지 이해하게 됩니다. 서로간의 담합이나 비밀스런 협약과 거래 속에서 힘없는 이들은 고통 당합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하는 이들의 내면이 얼마나 더러워져 있는지를 알고 그들의 훗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를 안다면 그들에게 분노하기보다 차라리 연민을 품는 것이 더 나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런 내적인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컨닝을 해서라도 좋은 성적을 받아 오면 결과를 바라보는 부모는 그것으로 기뻐할 뿐입니다. 자녀로 인해서 '자랑거리'가 하나 생겼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좋은 대학만 들어간다면 누구를 어떻게 짓밟든 누구에게 청탁을 하던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이들이 넘쳐나는 세상일수록 영적으로는 더욱 타락한 세상이 됩니다. 하느님의 사람들은 순수합니다. 영혼이 맑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 안에서 천덕꾸러기...

로마서의 조심해야 할 행동들

흥청대는 술잔치(진탕 먹고 마시기, 포식) orgies, banquetes 악마는 사람을 바로 악으로 이끌어 들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 사람은 도망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처음에는 좋아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이끌어서 최종적으로 그 사람을 타락시키고 맙니다. 우리가 하는 연회, 잔치는 사실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잔치들 가운데에는 본질적인 친교를 도외시한 쾌락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미끄러져 들어가는 모임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특히나 로마 시대에는 현대의 우리가 상상하기도 힘든 온갖 쾌락적 요소가 난무하는 연회가 벌어졌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현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추잡한 연회를 좋아하는 사람은 결코 1차로 끝나지 않는 잔치를 이어가면서 자신의 죄스런 갈증을 채워 나갑니다.  만취(취함, 폭음) drunkenness, borracheras 술이라는 것은 '흥겨움'을 불러오는 음식이자 기호식품입니다. 하지만 취함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술에 빠져들기 시작할 때에 그 술은 우리의 영혼에 심각한 위해를 끼치게 됩니다. 특히나 한국의 술 문화는 말 그대로 취하기 위한 목적의 음료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소비합니다. 그래서 더 빨리 취기를 느끼는 것 외에는 달리 술 그 자체가 고유하게 지닌 음식으로서의 가치를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형편입니다. 취함은 언제나 우리를 올바른 사고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또 영적으로도 죄스러운 쾌락을 찾도록 합니다. 그래서 지나친 취기는 언제나 영적인 타락과 이어져 있습니다. 음탕(음행)promiscuity, lujuria 우리의 성적 욕구는 정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부부 사이에서 사랑의 표현으로 그리고 자녀의 출산으로 이어질 때에는 하느님의 축복된 도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을 쾌락 그 자체로만 이용하려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심각하게 타락시킵니다. 우리가 성의 고유한 역할과 그 순수한 아름다움을 올바로 이해하지 않으면 곧잘 성은 쾌락의 도구로만 이용되고 또 그 쾌락은 강렬하기 때문에 수...

교회를 세우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마음 속에 교회를 다시 세우라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것이 실제로 무너져 가는 교회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돌들을 모아 작은 경당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 목소리의 의미는 물질적인 교회가 아니라 영적인 교회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는 내면의 교회를 다시 세우는 일을 시작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영혼의 눈이 감겨 있을 때는 엉뚱한 일을 두고 그것이 좋은 일인 양 매진 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니던 무렵만 하더라도 좋은 신학생이 된다는 것은 마치 술을 잔뜩 많이 마시고도 취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잘 버티는 신학생이 좋은 신학생이라는 분위기가 존재했습니다. 오죽하면 소주 한 잔 못 걸치고 고스톱 칠 줄 모르고 개고기 먹을 줄 모르면 신부가 아니라는 농담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소위 술사목이라는 것이 활개를 치던 때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사람들이 많이 모여 북적대기만하면 그 교회는 성장 하는 것이고 본당의 재정 규모가 커지고 흥청망청 원하는 대로 돈을 지출 할 수 있으면 좋은 교회 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교회는 그렇게 성장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문턱이 닳도록 교회를 드나 들었고 새로 지어지는 본당의 숫자는 늘어만 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기성세대 신앙 생활을 바라본 자녀들은 교회의 영적 가치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실망 해 버린 그들은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교회는 짠맛을 잃게 되었고 아무 짝에 소용없어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곳이 되었습니다. 성전에 돈만 생각하는 상인들이 가득하고 하느님의 기도하는 집이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교회 한해가 다시 밝았습니다. 저 멀리서 주님의 빛이 새롭게 비추어 옵니다. 이제 우리의 감겨져 있던 눈을 뜨고 하느님께서 우리 교회 바라시는 뜻을 올바로 이해하고 살아가기 시작해야 합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친교

저는 어린 시절부터 이사를 많이 다녔습니다. 그래서 죽마고우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조금 가까워지나 싶으면 휙 이사를 가버리게 되고 결국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것을 체험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삶의 환경이 오히려 다른 시선을 갖게 도와 주었습니다. 오랜 기간을 두고 사귀는 친구는 없지만 언제고 친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진정으로 친한 사람은 단순히 같은 공간을 오래도록 함께 공유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방향이 같은 사람이 진짜 친구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짧은 시간을 만나더라도 그와 나의 영혼의 지향점이 같다면 우리는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같은 시간을 오래 살아왔지만 마음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 공동체의 모습은 주변에서 쉽게 관찰됩니다. 당장 이곳의 모습만 보더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저마다 추구하는 목적에 따라서 사람들을 연합했다가 갈라지기를 반복합니다. 과거에는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친했던 이들이 어느샌가 마음이 갈라져 반목하고 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흔합니다. 그래서 '친교'라는 의미를 새롭게 정돈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친교는 세상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어떤 목적지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목적지는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친하고자 한다면 다음을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1. 우리는 같은 목적을 지향하는가? 2. 그 목적은 변함없는 것인가?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이런 질문에 부합하는 단 하나의 목적은 '하느님의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결국 진정한 신앙이 우리를 진정한 친교로 이끌어주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신앙은 올바른 가르침을 전제로 합니다.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다보면 내가 지향하는 하늘나라와 그가 지향하는 하늘나라의 목표가 전혀 딴판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 측은 부자들의 하늘나라를 기원하고 다른 측은 가난한 이들의 하늘나라를 기원한다면 언뜻 비...

저주 아래 있는 이들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 (갈라 3,10) 법은 어기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법을 어길 때에 그에 상응하는 벌을 줍니다. 무언가를 잘한다고 법이 관여하지 않습니다. 잘 하는 것은 원래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교통 신호를 잘 지켰다고 경찰이 와서 상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속도를 어기거나 차선을 어기면 와서 딱지를 끊어줍니다. 사제가 평일까지 열심히 강론을 열심히 준비한다고 교구에서 상을 내려주지 않습니다. 그건 원래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제가 '주일과 의무 축일에' 강론을 하지 않으면 신자들은 교회법적 근거를 따라서 사제를 교구에 고발할 수 있습니다.  교회법 767조 2항 회중과 함께 거행하는 주일과 의무 축일의 모든 미사 중에 강론을 하여야 하며 중대한 이유가 없는 한 이를 궐(생략)할 수 없다. 그래서 법이라는 것은 죄를 짓는 이들, 혹은 짓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죄를 짓는 이들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벌을 주기 위해서 또 죄를 짓고자 하는 이들은 그 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행위를 수정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그런 법을 살펴보는 이들도 다른 이를 심판하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이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 안에는 이미 율법 시대 못지 않은 수많은 규정들이 존재합니다. 심지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는 채로 지금까지 해 온 바 그대로 따라하는 일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수동적으로 형성된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신앙이라는 영역 안에서 하느님에게 나아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항상 누군가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미숙한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제가 가끔씩 놀라는 건, 어르신들이 빈 땅을 하나 두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다는 것입니다. 고추를 심을지 깨를 심을지, 야채를 심을지 잘 알아서 어떻게든 놀리는 땅이 없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을 '영혼의 텃밭'에 ...

영혼의 부유함을 함께 나누다

부유함의 영역에는 여러가지가 존재합니다. 물론 기본은 '돈'입니다. 돈이 많은 것 자체가 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올바름을 품지 않은 부는 죄가 됩니다. 즉 자신이 가진 그 많은 것을 올바른 목적에 사용하려는 의지 없이 자신의 쾌락을 위해 무턱대고 모으기만 하고 다른 이 앞에 으스대는 것은 큰 죄가 됩니다. 하느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돈벌이는 커녕  그러나 사람이 돈으로만 부유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다양한 것으로 부를 누릴 수 있습니다. 지식도 가질 수 있고 재주도 가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죄스런 부유함'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이 지닌 것으로 '교만'을 형성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남보다 많이 안다고 해서 부족하게 아는 사람을 무시하고 깔보는 것은 영적 교만이 됩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경우에 좋은 대학을 나오거나 유명 연예인이 되어서 자신을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면서 교만에 빠져 있는 사람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색다른 '부유함'에 대해서 묵상하게 이끕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 부유함입니다. 즉 자신은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에서 하느님을 마음껏 만날 수 있는 환경에 있으면서 그런 신앙의 기쁨을 타인과 나누지 않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적 영역을 오직 자신들의 놀이터로만 만들기 시작하는 이들입니다. 사실상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진정한 신앙의 자리가 아니라 그저 자신들이 늘 해 오던 일상의 습관의 자리가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안락함을 누리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선교의 정신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은 바로 그런 이들에 대한 비판을 이야기합니다. "불행하여라 시온에서 걱정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 하느님은 결코 우리 자신만을 위한 신앙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런 신앙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 외아들을 ...

의인

의인이 의인인 이유는 자신에게 잘난 무언가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의로움'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영리한 선택보다는 지혜로운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다. 돈 많은 사람에게 잘 보이고 힘 있는 이들에게 굽신거리면서 나의 안락한 미래를 꿈꾸는 것은 영리한 선택이지만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방향만 바라보면서 사람들의 반감을 사는 것은 세상에서는 어리석어 보여도 하느님 앞에서는 지혜로운 선택이다. 의인은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게 운명지워져 있다. 고통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지만 의인들은 그 모든 면에서 고통을 겪게 된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가난함도 견뎌야 하고 외로움도 이겨내야 하며 영적으로도 버림받는 것 같은 체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단련이야말로 그들의 내면의 보석을 진정으로 빛내게 된다. 의인들이 기다리는 영광은 지상의 영광이 아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취직자리를 얻고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것은 결국 '죽음'과 더불어 사라져 버릴 것들이다. 그래서 의인은 영원한 영광을 기대하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영광은 영원하신 분과의 만남의 순간에 온전하게 얻게 되는 것이다. 의인들은 오직 그 영광을 바라보면서 살아간다. 그렇게 의로움에 마음을 둔 이에게 세상은 그 숨겨진 진리를 드러내 보인다. 겉을 아무리 화려하게 꾸며도 속에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는 내면을 보게 되면 의인은 그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끼고 더욱 더 열정적으로 말씀을 전한다. 언젠가는 자신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으리라 하는 희망으로 그렇게 한다. 그러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닫는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바로 곁을 지나쳐가는 구세주를 바라보지 못한다. 그렇게 그들은 기회를 상실하고 자신이 가도록 운명지워져 있는 어둠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의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이는 주님을 믿고 신뢰하게 되고, 나아가 진리를 깨닫고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게 된다. 하느님의 사랑은 강력해서 그 어떤 것도 그 사랑에서 우리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