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 (갈라 3,10)
법은 어기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법을 어길 때에 그에 상응하는 벌을 줍니다. 무언가를 잘한다고 법이 관여하지 않습니다. 잘 하는 것은 원래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교통 신호를 잘 지켰다고 경찰이 와서 상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속도를 어기거나 차선을 어기면 와서 딱지를 끊어줍니다.
사제가 평일까지 열심히 강론을 열심히 준비한다고 교구에서 상을 내려주지 않습니다. 그건 원래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제가 '주일과 의무 축일에' 강론을 하지 않으면 신자들은 교회법적 근거를 따라서 사제를 교구에 고발할 수 있습니다.
교회법 767조 2항
회중과 함께 거행하는 주일과 의무 축일의 모든 미사 중에 강론을 하여야 하며 중대한 이유가 없는 한 이를 궐(생략)할 수 없다.
그래서 법이라는 것은 죄를 짓는 이들, 혹은 짓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죄를 짓는 이들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벌을 주기 위해서 또 죄를 짓고자 하는 이들은 그 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행위를 수정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그런 법을 살펴보는 이들도 다른 이를 심판하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이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 안에는 이미 율법 시대 못지 않은 수많은 규정들이 존재합니다. 심지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는 채로 지금까지 해 온 바 그대로 따라하는 일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수동적으로 형성된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신앙이라는 영역 안에서 하느님에게 나아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항상 누군가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미숙한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제가 가끔씩 놀라는 건, 어르신들이 빈 땅을 하나 두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다는 것입니다. 고추를 심을지 깨를 심을지, 야채를 심을지 잘 알아서 어떻게든 놀리는 땅이 없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을 '영혼의 텃밭'에 두면 무슨 일을 해야 할 지 몰라 항상 다른 이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신앙의 이 적극성,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누군가가 이끌어주기만을 바라는 수동적인 차원의 신앙이 아닌, 무엇을 어긋나게 할까 두려워하기만 하는 저주받은 생활이 아닌, 적극적인 신앙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이런 적극성이 없는 신앙인은 숫제 신앙생활을 시작도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깨끗이 씻어 놓은 내면의 영혼의 텃밭에는 전보다 더한 마귀가 일곱이나 더 들어와서 살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율법적 규정에 따라서 성사는 볼 줄 알지만 적극성을 지니고 무엇을 채워 넣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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