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는 단순한 고통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분명 고통이지만 그 고통은 자신의 영혼을 살리는 고통이자 다른 이들의 현실적 고통을 감소하는 고통입니다. 그런 구체적인 면이 있을 때에 비로소 '십자가'가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고통에서 도망치려고 할 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성당에서 외적 활동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 아니냐가 이 십자가와의 연계성을 결정짓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보다 내밀한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무리 쉬워 보이는 일이라도 그것이 나의 의지와는 정반대되고, 그러면서도 하느님께서는 내가 그 일을 하기를 원하실 때에 그 일이 바로 '십자가'가 됩니다. 반대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그 일을 내가 간절히 원하고, 그러면서도 하느님은 그 일에서 내가 손을 떼기를 바라실 때에 바로 그 '멀어짐'이 십자가가 되기도 합니다.
즉 십자가인가 아닌가를 살펴보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요소가 중점적으로 작용하고 있으니 하나는 바로 나의 의지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하느님의 의지입니다. 즉 '십자가'가 되려면 하느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어떤 일이어야 하고 또 그것이 나의 의지와는 오히려 상반되는 것이라 수용하기 힘들 때에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도전들에 직면하게 되고 우리는 가장 일반적인 반응으로 '회피'를 드러내게 됩니다. 그 십자가에서 도망치고 싶은 것이지요.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욕을 먹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의 뜻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친구가 되십시오. 우리의 의지를 하느님 가까이 이끌어 가도록 매사에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선과 악을 올바로 이해하고 선에 가까워지고 악에서 멀어지십시오. 외적으로 아무리 화려해도 그 안에 하느님의 뜻이 깃들지 않으면 포기할 줄도 알고, 반대로 외적으로 아무리 초라해 보이는 무언가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면 기꺼이 수락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
지금은 남편이 원하지 않는 일은, 그것이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자제할 줄 압니다. 예수님은 가정의 평화를 깨고 나와서 그런 일 하라고 부르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복음 전하는 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멈춘 것은 아닙니다.남편에게 순종하는 일이 이웃사랑 실천중 으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기에 여기에 제일 집중합니다. 제가 나가는 것을 남편이 원치 않기에 사람을 직접 만나지 않는 이웃사랑을 실천합니다. 겨울철에는 저희 집앞 도로 위(전철역 주변이라 수많은 사람이 오갑니다) 하수구 3개를 잘 관리해 횡단 보도가 물에 잠기거나 차도에 물이 고여 지나가는 행인들이 물벼락 맞는 일이 없도록 수시로 점검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 효과적이겠지만 기도를 주로하고 꼭 필요할 때 전화를 이용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여건을 마련해 주시겠지요. 마련해 주시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영적으로 조금 철이 났어요.
저는 수원교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청년인데요, 요즘 본당 내 청년들과 신부님과의 관계 안에서 문제들이 좀 생겨서요..
신부님께 메일로라도 면담을 요청 드리고 싶어 이렇게 댓글을 남기게 됐습니다~
기도하고 있지만, 지혜와 의견이 필요 한 것 같아서 신부님께 자문을 요청드리고 싶어서요~
괜찮으시면 혹시 답 메일 주실 수 있을까요?
jarte87@naver.com 입니다~
레지오에서 창조주의 어머니라고 적혀있는 것을 봤습니다.
저는 성모님이 겸손을 가르치시는 분이라고 어릴 때 성당에서 배웠습니다.
그래서 개신교 신자들에게 당당했습니다.
그런데 이젠 카톨릭이 성모님을 믿는 교회라는 말에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창조주의 어머니라니...
진짜 성모님과 가짜 성모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지극히 고귀하고 숭고한 나의 십자가여...
그대의 얼굴에 입맞추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