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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행 당하는 하늘나라



필요를 조장해서 행복을 착각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세상입니다.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그것이 없어서 아직 행복을 만끽하지 못한다고 사람들을 속이고 그것을 얻도록 온 힘을 기울이도록 하고는 그것을 얻고 나면 또 다른 목표점을 정해서 그리로 달려가도록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나 불행을 살아가고 '지금'을 거의 누리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시간은 '현재'입니다. 그리고 그 현재라는 시간은 그분이 보시기에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그 시간을 선으로 채워넣고 그 채워넣은 현재가 과거의 영역으로 가서 선이 가득한 과거가 됩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미래도 지금의 선의 결심을 통해서 현재로 구현될 때에 선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이렇게 사람은 선이 가득한 삶을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론이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는 다릅니다. 사람들은 '이기성'을 선택하고 참된 기쁨, 포근한 평화보다는 쾌락적인 요소를 탐하면서 서로를 파괴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언제나 긴장된 상태로 살아가며 나아가 하느님 자체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분은 없는 존재로 취급해 버리고 맙니다. 결국 자신이 뿌리 내려야 할 땅 자체를 부인하게 된 것입니다.

땅에서 뽑혀난 식물의 운명은 말라죽는 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죽음의 문화 속에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그 어떤 근본적인 기쁨도 없는 그 죽음의 문화 안에서 유일하게 사람에게 일시적인 충족감을 주는 것은 바로 재물이었습니다. 재물을 벌어들이고 그것을 쓰면서 거기에 더해 명예와 권력을 따르는 이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낙원에서 쫓겨난 사탄은 그런 이들을 유혹하여 더욱 강한 세력을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그분의 자녀들, 참된 평화를 누리고 기쁨을 만끽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은 언제나 그들의 참된 기쁨과 평화를 빼앗아가려는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이미 우리 내면에 형성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이 이미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문화에 저항해야 합니다. 우리는 신실하고 성실하고 선하고 온유하고 인내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댓글

하늘이님의 메시지…
+하느님 날구하소서.주님 어서오사 나를 도우소서.
Unknown님의 메시지…
신부님 늘 감사한 마음으로 신부님의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촬영하고 편집하고 유투브에 올리고 하는 일이 쉬지 않을텐데...
참으로 감사합니다.

지금 에스토니야에 출장 와서도 신부님 강의를 듣네요...
신부님의 강으를 들으면서 반성도 많이 하고
치유도 많이 되고 대리 만족도 많이 합니다.

부끄러움안에서 신앙을 통해서 조금씩 변해가지만
그래도 내안에 있은 많은 내면의 교만과 욕망과의
싸움은늘 저를 좌절케 합니다.
이런 영적 싸움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
제안에 얼마나 많은 더러운 것이 있는지....
이런 내 모습에 눈물이 날때가 많습니다.

신부님의 위로의 말에 늘 힘이 됩니다.
주님의 사랑안에 함께 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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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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