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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20의 게시물 표시

용기에 대해서

모두가 세상을 따르겠노라고 결심할 때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입니다. 청년들이 술을 마시면서 누구는 새벽까지 계속 마셔도 다음날 끄떡없다고 말하는 것이 용기가 아니라 점점 더 퇴폐로 치달아가는 그 모임에서 과감히 빠져나오는 것이 진정한 용기입니다. 자매들이 모여서 누군가에 대한 험담을 시작하고 그 정도가 선을 넘기 시작할 때에 자기는 더 재미난 이야기를 안다면서 자매들의 사악한 호기심을 잔뜩 채워주는 허망한 이야기를 준비하는 것이 용기가 아니라 그런 자매들 앞에서 험담을 하는 것은 주님 뜻에 바람직하지 않노라고 분명히 주의를 줄 줄 아는 것이 용기입니다. 이처럼 용기는 세상이 우리를 밀어붙이는 무모함이 아니라 주님의 뜻 안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는 내적 결의입니다. 신앙의 여정에는 용기가 많이 필요합니다. 그러자고 우리는 성모님의 군사가 되고 꾸르실료 활동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단체의 비호를 안락으로 삼아서 자신의 세상적 입지를 구축하려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허황된 것입니까?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짐짓 거룩한 체하는 이들의 실상에 대해서 하느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종류의 삶을 이미 오랜 시간 지속해 온 나머지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만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그것이 어색하고 불편하다면 고치려고 할테니까요. 손가락에 아주 작은 가시만 박혀도 우리는 불편해하고 빼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양심이 마비된 그들에게는 하느님이 너무나도 싫어하는 일련의 위선과 거짓이 익숙한 옷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사악한 의도를 품고 있는 자들의 운명은 불행합니다. 그들에게는 타오르는 열기가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사제를 유혹하려고 드는 여인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녀는 세상에서도 영원에서도 얻을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가 예언자라고 해서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그 보상을 잃지 않을...

중독에서 벗어나기

중독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물리적 영역'에 있는 모든 것이 중독을 야기시킬 수 있습니다. 보고(눈의 쾌락) 듣고(귀의 쾌락) 만지고(피부의 쾌락) 맛보고(혀의 쾌락) 냄새맡는(코의 쾌락) 모든 것에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중독이 야기될 수 있습니다. 대상을 그 자체로 즐기는 것과 그 대상에 '사로잡히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대상에 사로잡힐 때에 최종적으로 그 대상을 더 자주 더 충만하게 만끽하기 위해서 우리는 '돈'이라는 수단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중독을 야기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화의 분류에 집어넣을 수 있는 '종교적인 것'은 중독을 야기시킵니다. 하느님을 일절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종교적 외적 행위에 집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엉망 진창인데도 성당에 나와서 봉사한다고 돌아다니는 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종교적인 것'에 중독되어 버린 사람들입니다. 이는 심리적 영역의 중독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라는 '문화'에도 중독되고 또 때로는 '관계'에 중독되기도 합니다. 심리적으로 반대되는 성향의 사람에게 이끌리기도 하고 그 대상에게 중독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오히려 이런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합니다. 참된 신앙은 집착에서 벗어나고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 보다 충실하고 성실한 자아, 영혼이 자유로운 이로 거듭나도록 이끌어줍니다. 우리는 중독 상태를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영혼의 양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배워야 합니다.

호수 위를 걸으시다

혼돈 속에서 머무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느껴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사랑해야 하는 대상이고 그분을 올바로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혼돈이 없어진다는 사실에 대해서 제자들은 무지했습니다. 현대에도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자신의 삶을 혼돈 그 자체로 이끌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꾸 다툼이 일어나고 그것을 해결하겠다는 움직임이 또다른 다툼을 불러 일으키는 말 그대로 삶이 꼬여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중독 상태를 벗어나겠다고 다른 중독을 일으키기도 하고 쾌락을 추구하다가 돌이킬 수 없는 어둠에 빠져 버리기도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바로 맞바람을 맞으면서 호수에서 애를 써서 노를 젖는 제자들의 모습에 비길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일을 더욱 철두철미하게 함으로써, 즉 노를 열심히 저음으로써 이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예수님이 지나갑니다. 예수님은 정말 말도 안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바로 그 혼돈 위를 걷는 모습으로, 즉 혼돈 그 자체를 초월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흥미로운 것은 그들에게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곁을 지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에게 강압적으로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충분히 그분을 볼 수 있고 우리 측에서 그분을 부르도록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강압적으로 이루어지는 요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충분히 믿을 근거가 주변에 주어지지만 결국 나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는 충분히 혼동을 살아보았고 마음의 짐을 지고 살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것을 덜어줄 수 있는 충분히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존재로서 우리 곁을 자유롭게 지나가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분을 불러야 합니다. 하지만 제자들도 우리들도 안타깝게도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가오시는 예수님, 의로움, 선, 진리, 사랑, 평화이신 분을 혼돈 속에서 바라보면서 그...

덜 보기

현대인들은 사상 유래없는 '정보'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과거 책에서나 겨우 접하고 오가는 사람들의 소식을 통해서나 겨우 듣던 이야기를 오늘날에는 손 안에 들고다니는 온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휴대기기를 통해서 눈을 떠서 잠들기 직전까지 소비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좋은 정보를 선별하기가 쉽지 않아졌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가 '보는 것만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유투브에 아무리 내용이 많아도 우리는 '한국말'로 된 영상만을 관람합니다. 그리고 유투브가 보여주려는 것만 보기도 합니다. 검색하기도 귀찮아해서 대신 골라주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보는 동안에는 생각이 그친다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이 한때 바보상자라고 불린 이유는 텔레비전을 보는 동안에는 시청각이 자극되어 생각, 즉 숙고와 성찰이 멈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텔레비전을 보는 동안에는 다른 생각을 할 이유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만큼 우리는 생각을 멈추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조용히 권고하고 싶습니다. 깊은 생각을 더 많이 하는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덜 보았으면' 합니다. 보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는 좋든 싫든 무언가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가 작용하는 동안 '덜 볼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 덜 보는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읽고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