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무엇을 살릴 것인가?



귀금속 장신구를 잔뜩 지닌 사람이 물에 빠졌습니다. 구조요원이 뛰어들어서 물에 잠겨 들어가는 사람을 수면으로 끌어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급요원은 그의 몸에서 장신구를 떼어낸 뒤에 그를 다시 물 속에 잠겨 들도록 버려두고 홀로 물가로 나옵니다. 그리고 건져낸 장신구를 자랑스럽게 사람들 앞에 보입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구해 내었습니다."

무엇을 구한 것일까요? 아니, 무엇을 구해야 했던 것일까요? 그리고 물 밖에서 구조요원을 기다린 사람들은 어떤 것이 되돌아오기를 기다렸던 것일까요? 지금의 교회는 무엇을 건지기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그리고 무엇을 되살려야 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가 구해야 할 대상은 이번 기회에 물에 빠진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미 일찍부터 물 속에 잠겨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달란트 하나를 땅에 묻어두고 안심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땅 속에서 달란트는 녹슬어갔고 점점 그 하나 자체로도 쓸모없는 모양으로 변해 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달란트를 숨겨두는 것이 아니라 꺼내서 활용을 해야 했고 그것으로 다른 달란트를 벌어 들여야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사태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걱정하고 있을까요? 어떤 것이 사라질까 조바심이 난 것일까요? 혹시 그것은 기존 교회의 구조와 틀이 아닐까요? 성당의 재정과 인력 충원이 걱정스러운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진정 살려야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관심을 두고 있을까요? 복음은 어떻게 전해지고 있는 것일까요?

관점을 달리하면 보이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지금의 시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어떤 수단들이 보이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이렇게 다가선다면 볼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미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더 쉽고 빠르게 다가설 수 있도록 마련한다면 여전히 할 일은 많습니다.

단순히 신앙의 껍데기를 쓴 컨텐츠를 양산해 내는 것은 또다른 정보의 쓰레기를 생산해 내는 것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누구나 하는 일상 블로그에 '가톨릭'이라는 이름만 씌운다고 해서 신앙의 빛이 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신앙의 컨텐츠를 고민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어야 하지 건빵을 주면 고마워하기는 커녕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시대의 징표를 읽고 진정으로 목마른 이에게 시원한 물을 내어주는 구체적인 방식을 연구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을 모으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려고는 하셨지만 그 모두를 다 빛으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빛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응답하게 마련입니다. 숫자는 또한 교회의 재력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교회는 숫자에 연연하지 않는 교회, 나아가 경제력에 연연하지 않는 교회로 거듭나야 합니다.

복음의 진정한 빛에 기인하는 모든 시도는 환영받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인기에 연연하거나 숫자 늘리기에 혈안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어야 합니다. 세속 사람들의 목마름에 응답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녀들의 목마름을 읽어내고 그에 필요한 응답을 하는 교회로 거듭나야 합니다.

장신구가 아니라 사람을 살려야 하고 그것을 기다리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교회는 그 구성원들이 진정으로 갈망하는 방향으로 응답하게 될 터인데 정작 사람들이 그동안 교회 안에서 복음을 원했는지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루카 18,8)

댓글

익명님의 메시지…
나는 과연,영혼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나..자문해 보게 되네요..
그냥 머물러 있진 않은지..
주님,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제가 주님의 심정을 헤아리고,사랑을 살아가게 해 주세요!
부족하지만,신부님의 행복을 늘 기도드립니다!🍀🙏
익명님의 메시지…
나는 과연,영혼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나..자문해 보게 되네요..
그냥 머물러 있진 않은지..
주님,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제가 주님의 심정을 헤아리고,사랑을 살아가게 해 주세요!
부족하지만,신부님의 행복을 늘 기도드립니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