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잠언 30,8)
복음 정신에서 '가난'을 이야기한다고 우리가 극심한 가난에 시달려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성경은 극심한 가난에 처한 이들을 돕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말씀을 들으러 왔다가 집에 돌아가는 중에 쓰러질 군중을 염려하시기도 합니다.
복음적 '가난'이라는 것은 하느님에게 온전히 의탁하고 세상의 다른 영역(부귀영화, 명예, 권력 등)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다른 것들에 욕심을 내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생의 요소들이 존재해야 하고 또한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존엄을 해치지 않을 정도이어야 합니다.
극심한 가난은 생존의 위협을 가져오고 생존이 위협은 인간을 극단으로 몰아붙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극단의 상황은 인간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정상적인 상태라면 절대로 선택하지 않을 행동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한 이웃의 가장 기초적 필요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애덕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반대로, 사람에게는 저마다 '정해진 양식'이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표현대로라면 '일용할 양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각자의 필요가 모두 '동일'할 수는 없습니다.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에게서 일의 도구를 빼앗는 것은 그의 필요를 가로채는 것입니다. 반대로 필요도 없는 것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일은 허영과 사치가 됩니다. 바로 이러한 점의 혼란이 우리 가운데 존재합니다.
누군가에게는 분명히 '필요한 물건'이 다른 이에게는 '사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친구가 어떤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도 필요한 물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소비주의 사회는 우리가 모두 '넉넉히' 가지기를 세뇌시킵니다.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의 필요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가지도록 해서 낭비하고 허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절제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덕목입니다. 절제는 무턱대고 모든 것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색'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그런 사람을 우리는 '구두쇠'라고 부릅니다. 절제는 우리의 올바른 필요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필요를 인식하고 그것을 갖출 수 있도록 성실히 일해서 번 것을 합당하게 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순수한 영적인 상태라고만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그 행복에는 가능한 범주 안에서 우리의 구체적 삶의 영역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여유가 된다면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가고 외식을 하고 좋아하는 물건을 구입해서 유용하게 즐기는 것은 절대로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갈망하고 원하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성찰이 필요하고 절제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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