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임과 동시에 타인을 위해서입니다. 나 자신을 진정으로 위한다면 역설적으로 타인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일해야 합니다. '헌신적'이라는 말은 피로의 누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하는 것을 의미하지요.
하느님은 자비롭고 후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구하고 살리고 싶어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이룬 성과를 뽐내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이 두가지는 조화를 이룰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은 타인을 눌러야 내가 올라서는 세상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경쟁구도' 속에 들어 있고 한정된 자원 속에서 내가 무언가를 차지하는 것은 다른 이보다 먼저 그것을 누리기 위해서이고 누릴 기회를 잃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버스에 한정된 자리가 있고 먼저 올라서는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서서 가야 하는 것이지요.
이런 세상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성경은 '타인을 위한 헌신'을 가르칩니다. 그러니 우리의 상식적인 사고와 성경의 구원에 후한 하느님의 사고가 충돌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한 만큼 보상을 받고자 하는데 성경은 우리가 열심히 일했으니 타인이 구원을 얻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이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은 '하느님 안의 한 가족'이라는 생각을 회복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우애좋은 형제는 서로에게 일어나는 좋은 일에 서로 축복을 전해 줍니다.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일이 없지요. 마치 동생의 좋은 일이 형의 좋은 일인양 기뻐하고 반대로 형의 좋은 일은 동생이 그 영광을 입은 양 기뻐해 줍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입니다. 우리의 기쁨의 근거는 '내 주머니'에 무언가가 들어와서가 아니라 나의 형제가 구원의 대열로 함께 들어서는 데에서 기쁨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설명은 했지만 이러한 '공동체 정신'을 회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나 신앙을 전하는 현실은 의외로 '괴로운' 현실입니다. 신앙의 특성상 그 신앙이 전달될 대상은 '착하기' 보다는 반대로 악하고 신경질적이고 이기적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착한 사람이라면 굳이 신앙을 열성적으로 전하지 않아도 알아서 하느님에 대해서 배워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마태 20,15)
복음에 등장하는 주인의 이 말은 나름 포도밭에서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말입니다. 일을 열심히 하긴 했는데 정작 타인이 구원의 대열에 들어서는 것이 기분나빠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꼴찌가 되고 맙니다. 다 된 밥에 재 뿌린 격이지요.
우리는 과연 구원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여러분에게 구원은 다른 이를 밀치고 홀로 승리하고 이기고 뽐내면서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런 식의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자 한다면 주인의 뜻에 따라 일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다른 이를 구원으로 초대하는 그 일을 통해서 구원에 다가서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의 승리가 내포하고 있는 거룩한 꼴지됨 입니다. 다른 이를 먼저 살리고 하느님께 열심히 이끌어야 도리어 내가 첫째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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