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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 선포, 들음, 믿음, 받들어 부름

 



선포자의 영역    // 피선포자의 영역

파견, 선포(그리스도의 말씀) // 들음, 믿음, 받들어 부름



1. 선포자의 영역


1) 파견을 인식하는가?


2) 선포하고 있는가? (말씀, 진리에 충실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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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피선포자의 영역


1) 듣고 있는가?


2) 믿고 있는가?


3) 받들어 부르고 있는가?



피선포자의 영역부터 들어가 보겠습니다.


1) 듣고 있는가?


무언가를 듣는 행위는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외국어를 아무리 들어봐야 그 말에 대한 이해도가 없으면 의미 없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선포되고 있는 말이 뜻하는 바를 깨닫고 이해해야 비로소 듣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성경적 표현이나 교리적 지식의 전달만을 대상으로 삼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양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남이 나에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과 남이 나에게 하면 싫겠다는 것의 구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듣지 못하는 이는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구체적인 교리 진리를 듣지 못하는 수는 있겠지만 무엇이 바른 것인지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말씀은 누구에게나 선포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로마 10,18)


하지만 주님의 메세지는 더욱 명확한 형태로 알기 쉽게 전파되어야 하고 그분의 말씀은 알기 쉽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은 이 사명을 완성해 나갈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태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형태로도 분명 그리 될 것입니다.


2) 믿고 있는가?


말씀이 반드시 모든 이에게 어떤 식으로든 선포된다면 보다 중요해지는 주제는 바로 두 번째 항목이 됩니다. 즉, '믿고 있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말씀은 분명히 선포되지만 그 말씀의 본질적 의미를 이해하고 그 방향을 따라 나서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많은 이들이, 심지어는 신앙인이라는 이름을 지닌 이들을 포함해서까지도 실패를 하게 됩니다. 즉, 듣기는 하였지만 믿지는 않는 이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로마 10,16)


3) 받들어 부르고 있는가?


믿음이 완성될 때에 '받들어 부르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사실 교회의 모든 외적 행위는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받들어 부르는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이 기도 할 때에나 미사와 같은 전례에 참여할 때에, 그리고 일상을 살아 나가면서도 우리는 '받들어 부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거룩하고도 고귀한 행위는 당연히 주변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받들어 부르는 것을 단순히 기도라는 식으로 축소시켜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모든 존재로', 또는 '전 인격적으로' 받들어 불러야 합니다. 단순히 묵주알을 돌리는 식의 소극적인 기도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의 삶으로 받들어 부르는 행위를 완성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앞의 순환고리로 돌아옵니다. 즉, 선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포를 통해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스스로가 파견받은 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가지 영역을 충실히 이루고 있을 때에 우리는 '구원'이라는 영역 안에 들어와 사는 사람이 됩니다. 즉 우리는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이미 살고 있는 사람, 구원을 주변에 널리 퍼뜨리는 사람이 됩니다.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집안에서 아버지가 하느님의 거룩한 영을 받아 가정을 잘 보살필 때에 그 집안은 구원을 이미 사는 집안이 됩니다. 한 회사의 가장 대표자가 하느님의 정의 안에서 일을 처리할 때에 그 회사의 직원들은 기쁘게 생활할 수 있게 됩니다. 본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목자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해서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 본당의 신자들은 행복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음으로는 선포자의 영역을 살펴보겠습니다.


※파견과 선포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선포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포를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에서 이 일에 헌신할 만한 사람을 더욱 특별히 부르십니다. 우리는 그들을 주님의 제자라고 부르고 사도라고 부릅니다. 선포하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밝은 이들을 말합니다. 그 일 외에 다른 일에 신경쓰지 않는 이들을 말합니다.


1) 파견을 인식하는가?


이들이 자신의 직무를 올바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파견받음'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나서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이 불러주셨기에 이 일을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이 일 자체에 대한 의지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이 사명을 부여한 것이고 따라서 우리가 하는 일은 거룩한 의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파견을 올바로 인식하는 이는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바라고 계시는가를 잘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뜻을 올바로 식별하는 사람은 그분의 거룩한 뜻이 더욱 펼쳐지도록 애쓰는 사람이 됩니다. 당신의 뜻이 본인의 악습으로 가로막히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더욱 더 인격적으로 완성되어 가야 하고 거룩함의 훈련에 매진해 가야 합니다.


2) 선포하고 있는가?


파견을 받으면 당연히 선포하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여기서도 우리는 생각을 돌이킬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적지 않은 이들이 선포하는 것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선포는 단순히 앞에서 시끄러운 소리로 외쳐대거나, 어려워 보이는 신학적 지식을 보기좋게 나열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포는 마치 어린 젖먹이 아이들에게 음식을 먹이는 것과 같습니다. 단단하고 뜨겁고 매운 음식은 아이들이 먹기 힘들어 합니다. 먼저 우리 스스로가 음식을 잘 소화해야 하고 나아가 그것을 전해야 하는 이들에게 가장 적절하게 전하는 수단을 강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올바로 이해한 것을 올바로 전할 수 있게 마련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선포의 내용의 본질에 다가설 필요가 있습니다. 당연히 말씀이 그 핵심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신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에 익숙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생각하고 예수님과 더불어 말하고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일상의 변화 속에서 우리는 말씀을 곧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낼 수 있게 됩니다. 즉, 사람들은 나라는 존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인격적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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