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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이들에게 따르는 표징




1. 마귀들을 쫓아냄

예수님은 그 누구도 배척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들 스스로 배척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건 바로 진리의 가르침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가령 가난한 이를 돌보라고 하면 자신에게 가진 것이 많은 부자 청년이 슬퍼하며 떠나가는 식입니다. 또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려는 예수님을 앞에 두고 시기에 사로잡혀 그분을 죽이려고 드는 바리사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진리의 빛이 세상을 비추면 허황되고 거짓된 것들은 물러나게 됩니다.


2. 새로운 언어

무슨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새롭다는 의미를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새롭다는 것은 새로운 휴대폰이나 새로운 디자인의 옷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롭다는 것은 전에 사용하지 않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언어라는 것은 천상적인 언어, 즉 하느님만이 지니신 고유한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거래'를 합니다. 악인들도 서로의 뒤를 봐 주고 돌보아 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끼리만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언어는 빛을 찾는 이들에게 빛을 주는 언어입니다. 이러한 언어는 이전까지의 신앙인들이 사용해 오지 않던 언어입니다.


3. 뱀과 독에 해를 입지 않음

성경이 주로 가르치는 바는 '영혼의 해악'입니다. 뱀과 독이라는 것은 사악한 의도를 지닌 사람과 더러운 영적 가치들을 말합니다. 의인은 그러한 것들을 가까이 두더라도 해를 입지 않습니다. 내면에 그러한 요소들에 물들 의도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다와 함께 지냈지만 그에게 물들지 않았습니다. 물론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그분의 육신에 '죽음'의 손상을 입혔지만 그분의 거룩한 영은 그분에게 부활이라는 영광을 선물합니다.


4. 병의 치유

병에는 다양한 차원이 있습니다. 몸의 병도 병이지만 가장 중요하고 뿌리깊은 병은 마음의 병입니다. 하느님의 제자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 마음의 병을 치유해 줍니다. 그저 의로운 이들 가까이 머무르기만 해도 낫고자 하는 이들은 마음의 병을 치유하고 기쁘게 돌아갑니다. 물론 이 병의 치유는 자신이 병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이들, 즉 회개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스스로가 병이 심각한데도 그 병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치유가 선물되지 않습니다.


복음은 이러한 믿는 이들의 효과에 앞서 두 가지 뚜렷한 현실을 이야기합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모두에게 자동으로 선물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믿는 이에게 선물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이들은 그래도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믿을 수 있었으나 그렇게 의도적으로 하지 않은' 책임을 추궁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단죄'라고 부릅니다.

댓글

Unknown님의 메시지…
아멘~~❤
Unknown님의 메시지…
감사합니다 ~
항상 신부님 강론과 교리 경청 하는 신도 입니다.
주님 안에서 행복한것이 보여집니다.
신부님 의 표정을 보고서 저또한 행복해 집니다.
하느님 믿는 사람의 표정은 항상 행복한 표정 인것 같습니다.
저도 주님을 믿기전에 비해서 너무 행복 합니다.
세려를 받기 전에는 안가진 것을 부러워 하였기에 고민하고 욕심이 생겼지만.
세려를 받은 후에는 주신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행복 합니다.
신부님 의 밝고 아이같은 표정으로 강론하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가 아기를 보듯
저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습니다.
나이가 신부님 보다 아주 많치는 않치만 ...
신부님 의 티없이 밝은 표정에 절로 미소지어지고 행복해 집니다.
항상 신도들에게 진심이시고 한가지라도 더 알려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전해집니다.
신부님이 항상 건강 하셔서 지금처럼 유튜브 로 계속 소통 할수 있기를
주님께 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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