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더 나은 상태




더 나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애쓰는 것일까요? 아무리 해 본들 모든 것이 똑같은 것일 뿐이라면 왜 애를 쓰는 걸까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하루하루 애를 쓰면서 '더 나은 것'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파괴된 물건보다는 깨끗한 물건이 더 낫다는 것을 우리는 선천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영혼에게도 비슷한 것이 적용됩니다. 파괴된 영혼이 있는가 하면 더 나은 선을 향해서 나아가는 영혼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차이점을 올바로 구분해야 하고 더 나은 영혼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낮은 단계부터 천천히 살펴보겠습니다.


1) 파괴적인 영혼

파괴적인 영혼이 있습니다. 이 영혼은 멀쩡한 주변의 요소들을 파괴합니다. 바로 악을 저지르는 영혼이고 죄에 빠져 있는 영혼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으면서 오히려 그러한 일들을 즐기는 영혼입니다. 거짓말을 즐기고 허영심에 빠져 있으며 그러면서도 사람들 앞에서 위선을 떠는 영혼입니다. 하지만 그의 삶의 결과는 그의 주변에서 관찰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돈을 사랑하고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 시키는 일을 끊임없이 합니다. 이 영혼에게 오직 하나 필요한 덕은 바로 '회개'입니다.


2) 세속적인 영혼

세속 정신에 물든 영혼입니다. 악을 저지르지는 않지만 언제나 악 가까이 머물러 있습니다.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그의 영혼은 언제나 죄지을 기회를 살피지만 죄가 가져오는 수치의 위험을 인지는 하고 있기에 드러나게 큰 죄를 짓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마치 양이 울타리 주위를 서성이면서 달디단 독초의 향기에 마음을 사로잡히듯이 그 영혼은 세상 언저리를 헤메이면서 어떻게 하면 드러나지 않게 죄를 지을 수 있을지를 항상 고민합니다. 그리고 그런 내면의 욕구는 언제나 유혹의 근거로 작용하고 결국 죄로 쉽게 빠져드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3) 좋은 가치에 눈 뜬 영혼

이 영혼은 세상이 보편적으로 동의하는 가치에 눈을 뜬 영혼입니다. 그래서 좋은 평판을 찾아다니고 좋은 영적 양식을 습득하려고 애를 쓰는 영혼입니다. 위선적이지 않고 선을 기본적으로 사랑하고 가능하다면 남을 돕기도 하는 영혼입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세상의 좋은 범주를 초월하는 가치 앞에서 멈춰 서 있는 영혼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좋은 가치를 찾아 나서는 그의 노력은 그를 보다 드높은 가치로 자연스럽게 이끌어 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영혼은 비록 교회 밖에 있다 할지라도 언제나 더 드높은 가치를 바라보는 시선에 열려 있어서 쉽게 복음이 전해지는 영혼이기도 합니다.


4) 영적 가치를 찾는 영혼

세상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 영원의 가치를 이해하게 된 영혼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찾기 위해서 때로는 세상의 것을 기꺼이 희생하기도 하는 영혼입니다. 이 영혼은 주로 복음에서 오는 '믿음, 희망' 사랑'이라는 세가지 덕 가운데 하나에 열중하고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주님의 말씀의 내적인 의미에 눈을 떠서 말씀에 갈증을 느끼기도 하는 영혼이고 그렇게 얻게 된 영적 지식을 일상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영혼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올바른 식별을 지니고 악을 멀리하면서도 동시에 십자가 구원의 가치를 알기에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세상 안에 있지만 절대로 세상에 물들지 않는 영혼입니다.


이상으로 영혼의 상태를 분류해 보았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단계에 머물러 있을까요? 그리고 어떤 단계를 향해서 나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을까요? 영혼은 절대로 멈춰 있는 법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성장해 가거나 혹은 그 반대로 퇴보하기도 합니다. 어제까지 거룩함을 추구하던 영혼이 오늘 타락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