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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24의 게시물 표시

관계의 정의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관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내가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일단 나를 낳아준 존재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에 우리는 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부모'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들 알고 있습니다. 세상은 낳아준 부모가 있는가 하면 길러준 부모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시선을 더 넓히면 다음과 같습니다. 근원적으로 '인간'이라는 고차원적인 존재를 낳아주신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또한 세상에는 우리가 취사선택할 수 있는 관계가 있습니다. 흔히 '친구'라고 부르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살아가면서 내 주변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도 있고 내가 의도해서 관계를 형성해 나갈 수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닫힌 사회 속에서 주어진 관계 속에서 친구를 형성합니다. 시골 같은 지역은 다른 친구를 만날래야 만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나의 활동 범위가 넓어지면서 점점 내가 선택하는 친구가 생겨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관계를 신앙 안에서 다시 점검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같은 지붕 아래 살면 당연히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또 같은 동네에 살면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런 관계의 근본을 의심하게 만들어주고 또 진정한 가족, 진정한 친구, 진정한 관계의 의미를 되새겨 주십니다. 아무리 피로 맺어져도 헤어질 관계가 있습니다. 반대로 그 어떤 것도 섞이지 않았지만 가족보다도 더 끈끈한 관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참된 아버지이신 한 분 하느님 안에서 진정한 가족을 이룹니다. 그분을 알고 그분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이면 누구나 가족이자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관계라면, 세상에서 그 관계가 아무리 가깝다 하더라도 우리는 서

목자 없는 양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마르 6,34) 당대에 목자가 없지 않았습니다. 즉, 회중을 영적으로 이끌 직무를 가진 이들은 넘쳐났습니다. 마을 곳곳마다 회당이 있었고 그곳에는 회당장이 있었으며 이스라엘 전역에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양들을 이끌지 않았습니다. 사람들, 특히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환호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바를 올바로 이해했고 이해하면 할수록 그분의 말씀에 더 목이 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사막에서 목마름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주님의 말씀을 받아마셨고 그분이 가는 곳을 뒤따라 수고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육로로 시간이 걸리는 길을 빠르게 가려고 배를 타고 가는 예수님의 일행을 육로로 달려가 따라잡을 정도이니 그들의 열성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가끔 제가 있는 본당을 찾아오시는 분들에게서 제가 느끼는 바입니다. 오죽 목이 마르면 이 초전이라는 곳에 미사를 드리러 오시겠나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저는 교통비를 준다고 해도 가기 귀찮은 거리를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미사 한 대를 드리러 먼 길을 마다않고 오시는 분들을 보면 사실 감탄이 절로 나고 가엾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분들이 평소에 충분히 먹고 있다면 배고프지 않을 테니까요. 현대 교회는 목자가 많습니다. 그래서 가톨릭 신문 지상에 때로 사제 '면직'에 대한 기사가 올라와도 아직은 거뜬합니다. 사제는 여전히 많고 본당은 부족해서 많이들 특수사목으로 빠지고 보좌 신부가 주임이 되기에는 여전히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판입니다.  하지만 목마른 양들 같은 이들도 많습니다. 자신이 있는 신앙 환경에 실망해서 신앙에서 멀어져서 바깥에서 영혼의 위로를 갈구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성당은 나가지 않는데 사주나 점을 보러 다니는 이들은 넘쳐납니다. 요가와 명상을 신앙 대체품으로 삼는 이들도 많습

순명 - 주님의 뜻을 찾다

그리스도교의 구조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하느님'으로 나아가는 방향과 그 반대 방향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고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 그 방향을 설명하고 초대해야 합니다. 이는 너무나도 단순하고 명료한 사실입니다.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여정 속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목적지가 같다면 출발지가 달라도 결국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나아가는 이들에게는 '평화'가 존재합니다. 마지막 목적지에 대한 동의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돕기도 하고 필요하면 끌어주기도 하고 밀어주기도 하면서 길을 걸어갑니다. 서로 조금 다를 뿐, 마지막에 만날 것을 알고 있기에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각자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위해 일을 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 만나더라도 서로 친하게 지낼 수 있고 다정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움직임에 반대되는 방향이 있습니다. 바로 1독서의 흩어 버리는 목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양들을 모으는 데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들은 지극히 세속적인 사고 속에서 양들에게 이득을 취하고 정작 그들을 먹이거나 돌보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언뜻 굉장히 열심히 교회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람들 사이에 끊임없는 세속적 사고를 불어넣고 이간질을 조장하여 서로 다투고 싸우게 만드는 부류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내가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벌하겠다. 주님의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평화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평화라는 것은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서로 뒤를 봐주는 이해관계에 얽매인 이들은 언뜻 겉으로는 평화롭게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 이들은 언제라도 서로 수가 틀리면 머리 끄댕이를 쥐고 싸울 사람들입니다. 아주 작고 사소한 불편함도 견디지 못하면서 지극히 신경질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자와 양

 기본적인 질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목장에는 양떼가 있고 주위로 울타리가 쳐져 있고 바깥에는 이리떼가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질서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목장에서 벗어나 길을 잃은 양이 있고,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 양들을 공격하는 이리가 있기도 합니다. 질서를 회복하는 것은 벗어난 양떼를 모아들이고 이리떼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목자들 가운데에는 주님의 양떼를 파멸시키고 흩어버리는 목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일을 하지 않는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을 하면서 양들의 유대를 끊고 어둠의 요소를 끌어 들여 선한 양들을 흩어 버리곤 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된 목자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서 그분이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선한 영혼들에게 빛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마음 속에 탐욕과 이기심이 가득한 이들, 사람들을 이간질 시키고 교만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반대를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질서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그저 단순히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이미지를 내비치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짓 예언자들이 하는 일이고 그들은 바로 그러한 모습을 통해서 역으로 울타리 안에 이리떼를 끌어들여 선한 양들이 쫓겨나게 만들기 일쑤입니다. 어린 아이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올바로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쁜 것을 좋은 것인 줄 알고 입 속에 집어넣기도 합니다. 우리가 바로 믿기 위해서는 올바른 식별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좋은 것을 나쁘다 하지 않고 나쁜 것을 좋다고 하지 않게 됩니다. 내가 그들을 돌보아 줄 목자들을 그들에게 세워 주리니,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아멘.

미움을 받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셨다. 이 예언자들이 그들을 거슬러 증언하였지만,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2역대 24,19) 신앙은 사실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그 기본 구조는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하느님이 계시고 피조물이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순응'하도록 창조되었고 자연의 질서에 따릅니다. 다만 인간은 그 내면 속에 더 귀한 것이 있어 보다 드높은 가치를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이 간단한 구조가 복잡해지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자유를 그릇되이 사용함으로써 죄를 짓게 되고 세상에 복잡함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마치 원래 창조된 종이는 깨끗한데 그것을 구기고 찢으면 복잡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은 그 순수한 내면의 욕구 속에 하느님을 찾도록 되어 있는데 세상은 온갖 복잡한 요소로 인간의 내면을 찢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런 인간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예언자들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예언자들은 현재 진행중인 사람들의 내면의 혼란함을 거슬러 예언을 하도록 사명을 부여받은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은 달갑게 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 그들이 알려주고자 하는 것은 흔히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향을 '거스르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반갑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거부감이 느껴지고 그 말을 전하는 이들에게 반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 통상적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듣기를 바라는 것은 자신들이 욕구하는 것에 상응하는 말들입니다. 돈을 더 벌게 해 주고, 성공하게 해 주고, 명예를 얻고 권력을 쥘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더 달갑게 들릴 뿐, 하느님을 알게 해 주고, 그분의 사랑을 깨닫도록 해 주고, 그것을 위해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말들은 그저 자신들을 괴롭히는 것 같은 말들로 들릴 뿐입니다. 그러니 신앙을 선포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