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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다양한 부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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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일

오늘부터 성주간이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은 온갖 수모를 당합니다. 심지어는 입고 있는 옷마저 벗겨지십니다. 하지만 오늘 독서는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무엇이 진정하 수치인가?' 무엇이 진정한 수치일까요?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게 수치일까요? 아니면 하느님의 대전 앞에서 영구히 쫓겨나는 것이 수치일까요? 여기에서 신앙이 갈입니다. 참된 신앙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 그분을 실제 계신 분으로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무엇보다도 그분의 뜻을 중시하고 심지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반대한다고 해도 하느님의 뜻이 있는 곳이면 다가서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한국에 비교라는 것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우리는 고만고만한 우리 이웃들을 보면서 좀 모자란 것이 정상이고 가난한 것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가장 최고의 것을 찾아다니면서 지금의 우리를 비교해 보며 우리의 삶이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속아 넘어가면 안됩니다. 우리는 하느님 한 분 앞에 머물러 살아가야 합니다. 오직 그분만이 참된 수치를 판단하시는 분이십니다. 마치 복음의 군중처럼 사람들은 호산나를 외치면서 왕으로 세우려던 사람을 얼마 지나지 않아 십자가에 못박으라며 악을 쓰는 장면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의지하는 자는 헛된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참된 하느님 앞에서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그분 마음에 드는 일

예수님께서 하신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고 진리와 선과 사랑의 일입니다. 하지만 그 일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1독서에서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불뱀의 형상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둡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구리로 불뱀의 형상을 만드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일이 핵심입니다. 하느님은 불뱀에 물린 사람이라도 구리뱀을 보면서 살아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수많은 일이 있습니다. 성탄이 다가오면 성탄절 행사를 준비하고 부활이 다가오면 부활절 행사를 준비합니다.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일들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일을 통해서 추구하는 목적이 중요합니다. 예컨데 부활 행사를 하면서 오히려 사람들 사이에 경쟁이 붙고 서로 다툼이 일어난다면 그건 절대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람직한 부활 행사가 아닙니다. 이런 일은 교회의 여러 단체에서도 유사하게 일어납니다. 아무리 성가대를 한다고 해도 아무리 전례를 위해 봉사한다고 해도 그 안에서 구원을 위한 움직임이 존재하지 않고 자기들끼리의 모종의 파티가 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사실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이라는 것은 뭔가 하나를 콕 집어서 말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방향성의 문제이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때로는 그냥 가만히 숨 쉬고만 있어도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령 진심으로 참여하는 성 시간과 같은 일입니다. 또한 정신없이 바빠 심지어는 기도할 시간이 없을 때조차도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선교지에서 실제 가난한 이들을 적극적으로 돕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그 시간 동안에는 정말 코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힘들었지만 그 모든 일들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짐짓 거룩한 일들을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이라고 무작정 말에서는 안 됩니다. 속지 않도록 ...

습관화된 고해의 위험성

세상은 참 아이러니합니다. 사람들은 돈벌기를 원하지만 동시에 돈을 많이 번 사람이 무너지는 꼴을 보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죄를 추구하면서도 그 죄를 단죄하는 셈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주변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죄가 없다는 게 아닙니다. 그녀는 죄인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주변에 그녀를 단죄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그 여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간파했고 그것으로 여인을 돌팔매에서 구해 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간결했지만 핵심적이었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나이 많은 이들, 즉 자신의 삶에서 수많은 오류를 경험한 이들부터 시작해서 하나 둘 씩 떠나갑니다. 여인의 죄는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인을 용서하십니다. 다만 한 가지 전제가 있으니 그것은 우리가 얼마 전에 배웠던 것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이 말은 앞서 38년을 앓아 온 사람에게 한 말과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더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여인은 다시 한 번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결된 결말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부터 여인에게 달린 일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이 체험으로 다시는 죄악으로 다가서지 않을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이번 기회를 무사히 넘겼으니 다시 새로운 죄의 대상을 물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 이상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에게 이 장면을 보여주고 우리에게 결정하게 여지를 남겨둡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해를 봅니다. 그러나 때로 그 안에서 절박함이나 진실성을 찾기 힘든 경우도 많이 봅니다. 그저 습관화되고 의무적인 고해를 보는 사람이 많고 다시 얼마든지 같은 죄를 반복할 의도가 다분한 사람들을 자주 만납니다. 예수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누가 들어오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사...

상대적 가치

우리는 가치가 변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어릴 때에 정말 갖고 싶던 장난감을 어른이 되어서 돌아보면 왜 저런 것을 그토록 갖고 싶어했나 의아해 하기도 합니다. 결혼도 하기 전에는 이 사람 아니면 죽을 것처럼 하다가 결혼하고 나면 이 사람 때문에 죽겠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에서 만나는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고 변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초월적인 가치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가치 앞에 놓인 세상을 일컬어 '쓰레기'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세상 것들이 모두 쓰레기라는 말이 아니라 영원하고 초월적인 가치를 앞에 두고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상대적인 평가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지닌 가치를 지닌 사람에게 세상은 비슷한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미 그 힌트를 조금씩 보여 주십니다. 모든 이가 세상을 떠나게 되고 세상에서 누리던 것을 하나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엄연한 진리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하지만 모든 이가 같은 가치를 지닐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는 고집스럽게 세상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그런 이들을 앞에 두고 안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행위에 따라서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세상에 다른 가치, 초월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들이 받아들이든 말든 그들 앞에서 그 가치를 전해준 사람이 있다는 것은 기억할 것입니다. 때가 차면 우리는 뒤에 남겨진 것들을 내버려두고 다시 앞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서 하루 하루 열심히 달려야 합니다. 

새 일

광야에 길을 내다 광야는 메마르고 험한 곳입니다. 그곳에는 강도들이 사는 곳이고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주님은 그곳에 길을 내어 사람들이 길을 찾게 하고 안전하게 걸어가도록 도와 주십니다. 사막에 강을 내다 사막은 물기가 하나도 없는 곳입니다. 현대 사회는 영적인 사막과 같은 곳으로 저마다 스승이라고 외쳐대며 많은 것을 가르치려고 들지만 그 안에는 주님의 참된 생명의 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 주님은 그 사막에 물길을 마련하시고 강물처럼 그것을 흐르게 하십니다. 누가 와서 마셔도 전혀 줄지 않는 물을 주십니다. 들짐승들과 승냥이와 타조들도 나를 공경한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짐승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그 짐승들도 참된 것에 대한 감각은 살아 있어서 남다른 일을 보면 감탄할 줄 알고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을 공경할 줄도 압니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욕하고 있었지만 정작 로마의 백인대장은 그분의 본모습을 이해하고 경외한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이런 이들을 구하러 왔고 그들을 선택한 백성으로 삼을 것입니다. 반면 자신들이 안전한 영역에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은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 것입니다. 이런 일은 지금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에 대한 찬양을 전하다 찬양이라는 것은 사실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이는 조작된 행동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전례의 해를 살고 있지만 사실 전례라는 것의 본질은 우리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찬미입니다. 이 본질이 존재하지 않으면 전례는 딱딱하게 굳어진 행동이며 그저 전례에 대해서 조금 더 아는 것이 하나의 스펙이 되어버려 교만에 사로잡히게 하는 수단에 불과하게 됩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그들은 선택받은 민족이 될 것입니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눈이 머는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가장 기본적으로는 눈이 손상되면 멀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눈이 멀게 되는 이유는 아닙니다. 눈이 멀쩡해도 누군가가 눈을 가리면 눈이 멀게 되고, 또 눈이 볼 수 있는 빛이 사라져도 눈이 멀게 됩니다. 영혼에게도 유사한 일이 일어납니다. 영혼은 원래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 마음은 사람들의 빛에 깨어 있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돈에 눈머는 영혼은 없습니다. 어릴 때에는 돈이 뭔지도 모릅니다. 그때에는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눈멀기 시작하면 그런 순수했던 영혼의 상태가 변질되게 됩니다. 그리고 돈의 가치에 눈뜨기 시작하면 도리어 영혼의 본질적인 눈이 가리워지게 됩니다. 그러면 돈 때문에 사람을 증오하게 되고 탐욕으로 인해서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악은 영혼을 눈멀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을 살리려는 사람에게 살기를 띠게 되고 반대로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을 분별없이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의인은 철두철미하게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의인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 의로우신 분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의인은 자신의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의인은 의로움이 시키는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런 의인은 악인의 표적이 됩니다. 악인은 그런 의인을 한편으로 시기하고 한편으로 증오합니다. 그래서 그에게 갖은 모욕과 고통을 선물하려고 합니다. 악은 그렇게 사람들의 영혼을 눈멀게 합니다. 무서운 세상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상급은 이곳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원의 자녀들이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받아들여 당신 품 안에 안아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상급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