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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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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진리

왜 우리는 2000여년 전에 죽은 한 인물 때문에 이러고 있을까요? 그분의 존재가치가 무엇이길래 우리는 여지껏 그분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이는 일시적인 유행에 불과한 것일까요?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한때의 흥분상태일 뿐인 것일까요? 우리가 사용하는 부활초를 가만히 살펴보면 제일 위와 아래에 이상한 글자가 쓰여 있습니다. 바로 희랍어로 알파와 오메가라는 글자입니다. 이는 희랍어가 시작되는 단어이자 마지막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전에도 또 앞으로도 오실 분이시고 그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같은 진리를 전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일시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영원의 진리를 담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기본 구도로 되어 있는 다스림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에 동참하는 이는 그분의 힘을 통해서 함께 다스리게 됩니다. 이는 나 자신의 생존만을 염려하고 내가 잘 되는 길을 찾는 게 아니라 진리와 선을 위해서 기꺼이 수난을 끌어안고 스스로의 목숨을 하느님을 위해서 미워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부활하고 나아가 상급을 받고 다스리게 된다는 진리입니다. 하지만 모든 이가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교만했고 저마다 제멋대로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묵시록의 이 말씀은 분명한 진리입니다.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입니다.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고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영원한 권력

이 땅에서는 원하면 하느님을 찌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해서 그것이 다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원하면 범죄를 저지를 수 있지만 그러한 행동은 지상의 재판대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거부할 수 있고 그분의 외아드님을 해칠 수도 있지만 결국 그 모든 행위들은 합당한 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권력을 추구하는 이유는 '권력'이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허락된 권력 속에서 제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망각하는 일이 있으니 바로 '하느님의 참된 통치'입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잘 못 알아 듣습니다. '선이 항상 이긴다'라고 표현하면 조금 나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은 선이시니까요. 다니엘 예언서는 바로 그러한 통치, 즉 하느님의 통치를 예언합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통치, 우리는 그 통치권의 수장에게 복종할 줄 알아야 합니다. 눈 앞에 보이는 헛된 권력에 속지 마십시오. 그 어떤 막강해 보이는 권력이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한 순간일 뿐입니다. 들에 핀 풀꽃처럼 오늘은 생생해 보이지만 다음 날이면 여지없이 시들어 버리곤 하는 것이 세상의 권력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영원히 다스리시는 분의 참된 위엄과 권능 앞에 복종할 줄 아십시오.

평화를 알아볼 눈이 있는가?

  예를 들어, 금전적 이득을 갈구하는 영혼이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평화란 무엇일까요? 아마도 마음껏 돈을 걱정없이 쓸 수 있는 상태를 평화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평화는 '존재'할까요?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런 평화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도대체 얼마나 돈을 써야 만족할지 정해진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평화라는 것은 무엇인지 사람들은 모릅니다. 참된 평화라는 것은 우리의 모든 오감이 만족스런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평화는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결국 모든 것을 당신의 뜻대로 이루시리라는 것을 믿고 따르는 데에서 참된 평화가 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평화가 되십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평화를 알아볼 눈이 없습니다. 이들은 실제 예수님이 바로 곁에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그분을 평화로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에 평화를 알아볼 눈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엇이 평화인지 모르는데 그 곁에 평화가 지나간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좋은 포도주를 알아보는 눈이 없는 사람에게 포도주를 선물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차라리 막걸리나 한 병 사 주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평화를 알아볼 줄 모르는 이에게는 제 아무리 평화의 가르침을 전해도 무용지물입니다. 그들은 돼지들에게 진주를 던진 것처럼 그것을 물어뜯고 당신을 공격할 것입니다. 하지만 평화를 알아보는 눈을 가진 이들이 세상에는 존재합니다. 그들은 복음이 말하는 깨어있는 종과 같은 이들입니다. 그들은 항상 준비된 태도를 가지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쏜살같이 달려나가 문을 열어 줍니다. 그들은 깨어있기 때문입니다. 잠들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야욕과 탐욕,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 실낱같은 권력을 쥐고 휘두르고 싶은 욕구에서 해방되어 있는 그들입니다. 그런 이들은 오직 주인의 도...

심는 사람, 뽑는 사람

무언가를 심고 키우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 심어 놓은 것을 뽑고 망가뜨리는 사람, 나아가 심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앙은 그냥 자라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수고로 씨앗이 뿌려지고 돌보아지며 오랜 인고의 결과로 열매가 자라나고 수확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한국땅에서 지니고 있는 모든 신앙의 씨앗들은 우리 선조들의 피의 순교의 결과이기도 한 셈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 언제나 그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은 심는 데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들지 않으면서 심는 이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은 세상에 뒤섞여 있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같은 신앙 영역 속에도 공존하기 때문에 그저 성당을 같이 다닌다고 무조건 신심이 있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을 뵙고도 '더러는 의심했다'고 할 정도니까요. 비가 땅에 떨어지면 자연스럽게 목적지에 가 닿습니다. 허투루 쓰여지는 빗방울은 없습니다. 비를 받아들이지 않는 비닐 하우스 위에 떨어지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비를 받아들일 땅으로 흘러 내리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자신의 사명을 다 수행합니다. 은총에 목마른 이들은 은총을 받아들이고 기뻐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얻게 된 기쁨을 나누는 데에 사력을 다할 것입니다. 반대로 훼방꾼들은 훗날 주님이 오실 때에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믿지 않고 그분이 할 수 있는 능력을 신뢰하지 않은 그들은 그분의 진정한 힘과 권능이 드러날 때에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파견된 자입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아직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파견될 차례입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

이곳에서 꾸준하게 가르치는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가르쳐도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 주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종살이의 멍에'를 더 편하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해 오던 것을 하는 데에 안락함을 느낍니다. 거기에 어찌나 고착화 되어 있는지 새로운 것이 다가오면 그것이 아무리 본질에 더 가깝고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일단은 거부부터 하고 봅니다. 율법에 고착화 된 상태, 하지만 갈라티아서가 말하듯이 그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와 인연이 끊겼습니다. 다시 말해 특정한 행동습성을 통해서 의로움을 인정받고자 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은총에서 벗어나 있는 이들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분인데 그분을 죽은 것 가운데에서 찾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오늘 제가 말하는 것도 거의 이해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다시 말씀을 전하는 이유는 그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이를 올바로 이해하면 그의 삶이 변화되기 시작하고 그 주변이 바뀌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머무르는 이 장소도,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도 수명이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영원을 사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세상 것을 애착한다고 해도 지나고 나면 흔적도 없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가 아무리 융성했다고 한들 지금에 와서 그들의 권위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나 잠깐 누렸던 것들일 뿐 지나고 나면 모두 먼지와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초전이라는 공동체는 참으로 독특한 곳입니다. 모르긴 해도 이 공동체에 예수님이 오더라도 아마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는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가 왜 존재하는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들이 교회의 주인장이 되고 텃세가 생겨나게 됩니다.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이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서 자신들의 속에 가득찬 것으로, 성경에 의하면 탐욕과 사악으로 잔치를 벌이게 됩...

끌림과 거부

법이라는 것은 선을 긋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이라는 것은 선과 무관합니다. 국경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국경 안에 들어선 사람과 그 밖에 있는 사람이 있지만, 단순히 그것이 그 사람의 상태를 말해 주지는 못합니다. 이 나라 사람이 아닌 데도 안에 들어와 있을 수도 있고, 정반대로 이 나라 사람인데도 밖에 나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오히려 끌림과 거부에 가깝습니다. 참새가 향긋한 곡식에 끌리고, 무서운 동물에게는 거부감을 느끼는 것처럼 참된 믿음을 지닌 이들은 하느님에게 끌림을 느끼고 하느님 아닌 것에 거부감을 느낍니다. 여기서 몸과 영의 대결이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에 몸이 끌리는 것은 영이 거부하는 것이고 영이 끌리는 것은 몸이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을 지키려고 하는 이는 사실은 선 너머에 있는 것에 끌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를 짓는 것이 끌리지만 죄를 지어서 지옥에 가고 싶지는 않기에 그어 놓은 선에서 멈추는 것일 뿐, 근본적으로는 선 너머에 있는 것에 갈증을 느낍니다. 이를 말하는 것이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복에 이끌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복을 얻기 위해서 때로는 나에게 요구되는 ‘포기’도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이 예수님을 악마가 있던 광야로 보낸 것처럼 때로 우리를 인도해서 시련을 겪게 하더라도 그것을 끌어안습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예수님의 내면의 끌림을 왜곡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이는 세속에 끌리는 자들이 신앙에 끌리는 자들을 만나면 흔히 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들을 비난해서 자신들이 마치 옳은 사람이라도 되는 양 처신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을 속일지언정 하느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다가와서 성사의 은총으로 내면의 씻김을 받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