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그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사람이 좋지 않게 변해가는 데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삼구를 말합니다. 세속, 육신, 마귀입니다. 이 세 가지는 나름의 특징으로 인간을 하느님에게서 떼어놓고 어둠에 빠져들게 합니다. 그러한 것들로 인해서 우리가 저지르게 되는 것이 죄입니다.
세속에 이미 찌들어 있는 사람은 세속이 더이상 유혹이 되지 않겠지만 하느님을 찾으려는 사람에게 세속은 끊임없는 유혹이 됩니다. 마치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이집트를 그리워 한 것처럼 세속은 하느님을 향해 여정을 떠난 이에게 끊임없이 돌아오라는 유혹을 던집니다.
육신은 그 기본적인 필요를 떠나서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육신은 항상 영혼이 나서야 할 때에 멈추도록 유혹합니다. 더 쉽고 더 편한 것을 찾아서만 살아가도록 우리를 유혹하여 우리가 말씀의 봉사자가 되거나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데에 의욕을 꺾으려고 합니다.
마귀는 아주 교묘하게 하느님에게서 우리를 멀어지게 만듭니다. 심지어는 거룩한 것을 이용해서라도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합니다. 마치 열심히 성당 활동을 하는 듯이 보이게 하여 우리를 착각하게 하고는 실제로는 하느님 아닌 것을 추구하게 해서 우리를 더욱 교만하고 허영에 가득차게 만드는 일도 허다합니다.
이런 죄는 우리를 타락시키는데 그 타락상은 영혼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육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과한 술은 간을 상하게 하고, 지나친 쾌락의 추구는 그 기관을 망가뜨리기도 합니다. 건강에 좋다고 먹어댄 것이 도리어 부작용을 일으켜 반신불수가 되게 만들기도 합니다.
모든 장애가 죄의 결과는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사람은 다름 아닌 죄의 결과로 육체의 괴로움을 얻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낫게 하십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깁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몸을 움직이지 못해 서른 여덟 해나 앓는 것이면 꽤나 괴로운 일일 터인데 예수님은 '더 나쁜 일'이 있다고 표현하십니다. 과연 어떤 것이 38년을 움직이지 못하고 마비된 것보다 더 나쁜 일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영혼의 타락입니다. 육체의 타락은 결국 '죽음'이라는 것으로 그 끝을 맞이합니다. 육체라는 도구는 죽음까지 우리에게 허락된 하느님의 선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 잘 가꾸고 성실히 선을 이루는 데에 써야 합니다. 하지만 육체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 본질이 다가옵니다. 바로 영혼의 상태입니다.
죄는 육체를 망가뜨리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영혼을 망가뜨립니다. 영혼이 망가지는 것이 사실 더 나쁜 일입니다. 고해소에 있으면 어르신들이 성사를 보러 옵니다. 더는 육체가 예전 같지 않아서 육체로 죄를 지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나이 80에 바람날 일도 없고 그럴 기력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죄가 없는 것은 아니니 아직도 잘 움직이는 '혀'로 죄를 짓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험담을 하고 흉을 보면서 계속해서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치 그런 일이 별 일 아니라는 듯이 성사를 봅니다.
차라리 누군가를 때리면 그 흉터가 남고 큰 일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더 큰 일은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타입니다. 육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서 안정되고 치유되지만 영혼의 상처는 보이지 않기에 방치되는 경우가 많고 나중에는 돌이키기 힘든 악습으로 자리잡기도 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사람은 더는 자신이 둘러대는 그 말로 마음아파하지 않습니다. 또 누군가의 험담을 일상으로 삼고 하는 이들은 그것을 딱히 죄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묻습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이는 그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양심이 선을 지향하고 있는지 묻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정말 건강해지고 싶을까요? 아니면 그냥 올해도 허울좋게 남 보기에 그럴싸한 사순을 보내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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