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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서술

시라는 것은 미묘한 문제를 표현하는 좋은 방법인 것도 같다. 하지만 시의 문제점은 좋아하는 사람들은 좋아하지만, 시라는 유형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예 다가서지도 못하게 하는 미묘한 장막도 존재하는 것 같다. 서술하는 글은 주저리주저리 생각을 표현하긴 쉽지만, 다른 한 편으로 그 난점은, 분석적인 사람들이 달려들기 쉽다는 거다. 글의 중심 주제는 온데간데 없이, 그 가운데의 말마디들과 표현들에 집중을 하기 시작하고, 결국 저자의 본의는 사라지고 쓸데없는 논의의 장이 전개된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이 좀 굵으면 어떠하리요... ㅋ

성인(聖人)

우리가 아는 성인은 지극히, 그것도 극도로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실제 성인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여러분의 아버지나 어머니 중의 한 명일수도 있으며, 친구들 중에도 존재할 수 있다. 성인이라는 말의 의미는, 거룩한 사람, 즉 세상과는 분리된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 마음 깊이에 '하느님을 향한 열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문제는 '우리가 상정한 기준'이다. 성인은 이래야 한다, 성인은 저래야 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 인간들이, 그것도 많은 경우에 성인들도 아닌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까다로운 기준이고 절차일 뿐이다. 기적이 있어야 하고, 사상 검증을 받아야 하는 등등등의 수많은 절차들, 그리고 오랜 시간의 조사과정은 성인을 성인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우리 일상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상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성인'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아예 딴 생각을 하게 된다. 성인은 그런 게 아니다. 성인은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가? 성인은 여러분들처럼 선택에 있어서 갈팡질팡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가? 성인들도 그랬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나약했던 성인들도 존재했는지 모른다. 인간의 '나약성'을 죄와 똑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말자. 나약함 때문에 쉽게 죄에 빠질 수는 있어도, 나약함이 곧 죄는 아니다. 그리고 인간 중에 죄를 단 한번도 짓지 않을 정도의 완벽한 존재는 예수님 밖에는 없었다. 고로 성인들도 죄를 짓고 뉘우치는 과정을 수도없이 반복했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런 내용들은 성인전에서는 삭제되거나, 나와도 과하게 포장되어서 무슨 마귀와의 전쟁을 하는 식으로 묘사되거나, 아니면 축소되어 나오게 마련이다. 성인전은 그들의 성성을 논하는 자리이지, 그들의 나약함과 죄를 구태여 세세하게 기술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가톨릭 내의 성인들을 묘사하는 흐름은, 우리에게 그릇된 성인관을 심어 놓았고, 결국 '우리가...

다 때가 있다.

다 때가 있다. 속이 뒤집어져라 술을 마셔볼 때가 있고, 마음이 절절하게 사랑에 빠져볼 때도 있다. 신앙적이거나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헌신할 때가 있고, 금세 식어 세상에 다시 없는 현실주의자가 될 때도 있다. 그런 시기들을 한바퀴 돌고나면, 삶을 재발견하는 때가 다가오게 된다. 먹고 마시는 단순한 행위에도 하느님이 함께 하심을 발견하며, 죄라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저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근본 방향의 선택이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된다. 그 때가 오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것들이다. 문제는, 그 첫 '조명'의 시간을 개개인별로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것인데, 누구는 특별한 도우심으로 얻고, 누구는 수도없이 부딪히다가 안되니 스스로 찾아나서기도 하고, 누구는 어느 순간의 상쾌한 공기를 들이키면서 깨닫기도 하고, 누구는 다른 누군가와의 만남으로 이루기도 한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깨달음의 기회가 많은데, 한편으로 이는 좋은 일이면서 다른 한 편으로 변명의 여지를 없애는 일이기도 하다. 차라리 모르면 덜 맞을 것을, 안다고 자부했다가 큰일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삶을 조명하라. 조금만 현명함을 지니면 내가 '정말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되고, 내가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제로는 둘도 없는 보물이게 된다. 오천명을 먹인 것은 기술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었고, 예수님은 임금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셨다. 아직도 빵 찾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서 안타깝다.

성체와 성혈

참 중요한 대축일이다.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예수님의 몸과 피의 대축일. 하지만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본의를 이해하고 있을까? * 가치알기 먼저, 무언가를 받으려면 그 가치를 잘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받은 것을, 손에 쥔 것을 소홀히 하기 일쑤다. 어린 아이에게 다이아몬드 원석 던져주면 차돌인 줄 알고 가지고 놀다가 흙바닥에 버리고 온다. 마찬가지 일들이 매 미사 때마다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 그 자체이신분을 미사 때마다 받아 모시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일상으로 돌아와 그분을 세상에 던져버리고 만다. 의미를 깨우쳐보자. * 성체 살펴볼 것은 '음식'이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으로 우리를 형성한다. 하지만 주님이 주는 음식은 형성 방향이 좀 다르다. 그분의 음식은 우리의 마음과 영 안에 '사랑'을 형성해야 한다. 헌데 과연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잊고 마는가? 몸이 받아들이는 음식은 입으로 들어가 뒤로 나온다. 하지만 이 거룩한 음식은 믿음으로 받아들여 영으로 들어가 우리의 사랑을 넘쳐흐르게 해야한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미건조한 마음으로 이 성체를 받아 모시고 심지어는 그 의미를 단 한 번도 생각지 않은 채로 의무감으로 미사에 나와서 돈내고 빵 사먹듯 봉헌금내고 밀떡 하나 받아물고 가버린다. 예수님을 먹는 사람은 예수님을 모신 사람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이제 내 안에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 사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우리는 여전히 '나'를 찾으려 한다.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오직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보기에 좋은 것, 내가 바람직한 것을 찾는다. 그래서 여전히 다투고 지낸다. 예수님이 보기에는 모든 이는 조금의 실수와 잘못이 있지만, 당신 스스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랑해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그들은 오류 덩어리에 미움과...

기도

'기도하라'는 말을 많이 듣게된다. 신자가 아닌 사람이 들으면, '뭐야 그게?'라고 할 말마디다. 이해한다. 왜냐면, 신자들조차 '기도하라'는 말을 하거나 들으면서 그저 형식적으로, 말 그대로 바리사이들의 위선처럼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로 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기도'는 뭘까? '대화'란다.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 그렇게 배워오긴 했는데, 이 대화 좀 이상하다. 대화는 쌍방간의 말의 주고받음인데, '기도'라는 대화는 지 혼자 지껄이는 것 같다. 흠... 여기까지 와서 생각이 막히면 그나마 다행이다. 많은 신자들은 그냥 지껄인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 잔뜩 지껄여놓던지 아니면 정해진 형식에 따라서 지껄인다.(성무일도, 로사리오 - 열심한 신자들 보면 좀 화날수도 있겠다 ㅎㅎㅎ) 기도에는 분명 응답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응답을 듣고있고 알고있다. 꼭 목소리로 들려야 응답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초짜다. 하느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말을 건내신다. 많은 경우에 하느님이 먼저 건네신다. 길가다 거지를 만났다. 분명 하느님이 먼저 말을 건다. '어이 좀 도와주지를?' 근데 우리는 생깐다.(생깐다는 말은 무시하다의 젊은이들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방금 들린 건 아무것도 아닌 거라고 생각해 버리던지, 아니면 벌써 변명거리 찾기에 고심이다. '에이, 저런 사람들 사실은 다 부잔데 저렇게 나와서 구걸하는거야.' 이런 생각 나도 해봤다. 그래서 안다. ㅎㅎㅎ 이렇게 하느님 목소리를 듣고도 생까고 나서는 저녁에 돌아와 지껄이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구절들 일색이다. 지껄이면서 스스로 성인이라도 된 듯이 착각한다. 실제로는 쫌생이, 구두쇠면서... ㅎㅎㅎ 미운 사람 만났다. '어이, 오늘은 니가 가서 한번 웃어주...

소금과 등불에 대한 비유

소금은 음식을 맛나게 하기 위해, 빛은 밝히기 위해 존재합니다. 각자의 것들은 다 자기 존재의 근본 이유가 있게 마련이지요. 신앙인, 그리스도인의 이유는 뭘까요? 그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입니다. 예수님을 믿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짠 맛 입니다. 예수님이 괜찮다 하면 괜찮은 겁니다. 예수님이 걱정 말라 하면 걱정 안해도 되는 거지요. 먼저 그분의 나라와 의를 찾고, 세상 일들 걱정말라 하면 그분 말씀을 좀 믿으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걱정이 되고, 일단 내 주변에 좀 쌓아 놓습니다. 그게 재물이든, 명예든 미모든 지식이든 말이죠. 뭐든 나에게 현실적으로 힘을 주겠다 싶은 것들을 좀 재어 놓습니다. 그러다보니 정작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짠 맛을 잃어갑니다. 그리스도인 같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버립니다. 짠 맛을 잃은 소금, 신앙을 잃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 버려져 허덕이다가 결국 짖이겨져 버리고 맙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지요. 다른 이에게 비출 빛이 없으니... 자랑스럽게 등경 위에 올려 놓지도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짠 맛,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우리에게 '사랑'하게끔 종용합니다. 이유없는 사랑 받을 걸 기대하지 않는 내어줌. 사실 받을 걸 아예 기대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하늘나라'에서 받을 거라고, '하느님'이 주실 거라고 기대하지요. 하지만 이런 기대를 세상 사람들은 하지 못합니다. '하느님'? 그런 게 어딨어? 라고 생각하면서 그 하느님 믿고 내어주는 그리스도인들을 웃기다며 천하게 바라보지요. ㅎㅎㅎ 저는 압니다. 추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들은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며, 우리들의 영광은 영원히 빛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간직해 온 빛, 황금의 빛이 아니라 신앙의 영롱한 빛이 온 세상에 자랑스럽게 비추이게 될 ...

성화

어느 분이 올린 사제 성화의 날 메세지를 읽고는 잠시 생각해본다. 성화, 거룩하게 됨. 거룩하다는 개념은 '분리된다'에서 나온다고 한다. 세상에서 분리되어 하느님 가까이 머무는 만큼 거룩하다고 보면 된다. 헌데 분리라고 해서 어느 한 쪽으로 완전히 떨어져 나가는 게 아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건, 인간이 되라고 만드신거다. 가장 인간다운 게 가장 거룩한 거다. 뭔 소리냐고? 거꾸로 생각해보자. 우리는 인간답지 않은 걸 인간답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 인간은 육과 정신과 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세 가지를 골고루 추구하지 않고 하나에 치중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누구는 몸, 즉 이 세상의 삶만 잘 보살피려고, 잔뜩 모으려고 난리, 누구는 정신적으로 고상해지려고 잔뜩 배우려고 난리, 누구는 영만을 챙기겠노라고 잔뜩 교만해져 난리... 이 세 파트를 어느 하나 소홀히 해서도 안될 것이다. 몸도 챙기고,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고... 정신도 챙기고, 할 수 있는 한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배우고, 건전한 사고를 유지하고, 어느 하나에 고립되지 않고... 영도 챙겨야 한다. 하느님 잊지 않고, 늘 기도하고, 많이 사랑하고, 기꺼이 이웃의 고통도 나누고... 거룩하다고 해서 맨날 천날 성경만 파거나, 기도만 한답시고 일상을 전혀 챙기지 않는다면 뭔가 이상한거다. 관상 수도원인 갈멜 수녀원에도 일상의 일을 해야 하고, 배움의 길을 걸어야 하며, 대학 교수도 가정을 보살피고 신심행위에 참여할 필요가 있으며, 노가다 아저씨도 때로는 배워야 하고, 하느님을 기억하는 시간도 가져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많은 사제들은 보다 치중해야 할 영을 제쳐두고는, 너무 몸과 정신만 챙기는 느낌이다. 많이 가지려 들고, 많이 배우려 들어서 독선적이고 교만하고 탐욕스럽다는 비판을 받는 걸 많이 봤다. 영적인 부분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사제 성화의 날, 신자들이 거룩한 사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