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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와 성혈

참 중요한 대축일이다.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예수님의 몸과 피의 대축일.
하지만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본의를 이해하고 있을까?

* 가치알기
먼저, 무언가를 받으려면 그 가치를 잘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받은 것을, 손에 쥔 것을 소홀히 하기 일쑤다.
어린 아이에게 다이아몬드 원석 던져주면 차돌인 줄 알고 가지고 놀다가 흙바닥에 버리고 온다. 마찬가지 일들이 매 미사 때마다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 그 자체이신분을 미사 때마다 받아 모시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일상으로 돌아와 그분을 세상에 던져버리고 만다. 의미를 깨우쳐보자.

* 성체
살펴볼 것은 '음식'이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으로 우리를 형성한다.
하지만 주님이 주는 음식은 형성 방향이 좀 다르다.
그분의 음식은 우리의 마음과 영 안에 '사랑'을 형성해야 한다.
헌데 과연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잊고 마는가?

몸이 받아들이는 음식은 입으로 들어가 뒤로 나온다.
하지만 이 거룩한 음식은 믿음으로 받아들여 영으로 들어가 우리의 사랑을 넘쳐흐르게 해야한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미건조한 마음으로 이 성체를 받아 모시고 심지어는 그 의미를 단 한 번도 생각지 않은 채로 의무감으로 미사에 나와서 돈내고 빵 사먹듯 봉헌금내고 밀떡 하나 받아물고 가버린다.

예수님을 먹는 사람은 예수님을 모신 사람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이제 내 안에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 사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우리는 여전히 '나'를 찾으려 한다.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오직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보기에 좋은 것, 내가 바람직한 것을 찾는다.
그래서 여전히 다투고 지낸다.
예수님이 보기에는 모든 이는 조금의 실수와 잘못이 있지만,
당신 스스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랑해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그들은 오류 덩어리에 미움과 증오의 대상이 된다.
예수님이 보기에 하느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나머지는 덤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돈, 명예, 권력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실제적이고 최선의 가치이다.
헐...
백날 성체를 모셔대지만,
어리석은 우리들은 깨닫지를 못한다.
성체를 모실 자격조차 없는 이들이 함부로 성체를 입으로 들이고,
더욱이 성체를 모시는 이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으면서
성체를 모독하고 있다.
공복재 지키지 않는다고 성체를 모독하는 게 아니다.
예수님의 몸을 담고서 세상에 돌아와 예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것이야말로
그분을 모독하는 것이다.

*성혈
예로부터 피는 거룩한 계약의 행위에 사용되어져 왔다.
피는 생명이기에 이 계약은 한 생명을 바쳐 이루어지는 계약이다.
예수님이 맺은 이 피의 계약은 다름아닌,
'우리의 죄사함'을 위한 것이었다.
피를 철철 흘려 죄의 용서를 빌어야 할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님의 단 한번의 피흘림으로 깨끗하게 된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겪으셔야 할 고통을 겪으셨다.
'대속'이라는 이 개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아이가 컵을 깨지만 어머니가 치워줄 수 있다.
어머니는 아이가 저지를 잘못의 수고를 사랑으로 대신 져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 죄로 저지른 죄의 댓가를 당신이 이미 지불하셨다.
이 십자가상의 피흘림이 매 미사때마다 '재현(재연은 이미 일어난 일을 다시 연기해 보는 것이고, 재현은 지금 이 순간이 그때 당시의 순간을 현재화하여 그때의 일이 고스란히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하게 된다.

예수님은 미사의 순간에 지금의 우리 죄를 없애기 위하여 다시 피흘리고 계신 것이다.

왜?
우리의 죄를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의 사랑의 피흘림 뿐이기 때문이다.
지금 감히 내가 글로 담아내고 있는 이 거룩한 사랑의 행위는...
쓰고있는 나 조차도 이해하기가 힘들다.
나는 하찮은 고통이나 불편조차 참아받지 못하는데,
당신은 이런 나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고 있다.

*우리의 모습들...
자, 이 거룩한 계약의 잔치가 당신 앞에서 '미사'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헌데 우리는 휴대폰 소리나 울려대며,
딴 생각이나 잔뜩 해대며,
미사 후에 한 잔 할 생각이나 하며,
나의 악습을 전혀 고칠 생각조차 없으며,
증오하는 이에 대한 증오를 가득 담고는...

이 거룩한 죄사함의 잔치에 참여하려 하는가???!!!

세상 끝날에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이유는,
우리가 저지른 하찮은 죄들이 아니라,
다름아닌 그분의 사랑을 너무나도 철저히 무시한 탓이리라...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깨달을 그릇이 되지 못해서,
훗날 그분 앞에서 이를 갈게 될지도 모른다.

각성하라 신자들이여.
주님의 사랑이 우리 가까이에 있다.
10명의 가톨릭 신자들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이 진리를 깨닫는다면,
나머지 9명을 다 하느님의 대전으로 이끌 수 있다.
각성하라 신자들이여.
우리의 복음 선포의 사명을 잊지 말자.

오소서 주 예수님.
어서 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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