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뭔가를 따르고 싶어하고 남기고 싶어한다.
'전통'이자 '매뉴얼'이다.
누군가 무사히 목적지까지 도달한 그의 발걸음을 그대로 따라가면 적어도 엇나가지는 않을거라는 믿음.
하지만 목적지 자체가 바뀌었을 수도 있고, 길 중간에 큰 돌이 놓여 있을 수도, 없던 강이 생겨날 수도 있다.
'변수'가 있는 것이다.
메뉴얼은 이 변수를 가정하지 않는다.
변수는 너무나도 많고 다양해서 어떻게 정해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건, 몇 번 버스를 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느 정거장의 어느 위치에 내려서,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 향해서,
어떤 표지판에 좌회전 우회전을 해야 하는지까지 상세하게 알려줄 순 없다.
우리 인생에는 정확한 메뉴얼이 없다.
이 불확실성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누군가가 '이게 메뉴얼이다'라고 만들어놓은 길을 가려 한다.
공무원이나 교사가 인기있는 이유다.
누군가는 정말 재능이 있어 하겠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안정'을 찾아서 택한다.
하지만 그 안정이 진짜인지 한번 쯤은 의심해 봤으면 좋겠다. 내가 아는 한 '현세적 안정', 그건 엄청난 '허상'이다. 숨겨놓고 알려주지 않은 변수가 엄청나다. 그래서 병이라도 생기거나 직장에 문제가 생기면, 그런 이들은 숨이 막혀 죽으려 한다.
신앙은 근본 '불확실성'에 기인한다.
참고할 수 있는 예시가 '예수님' 뿐이라서,
오직 그분만이 '부활'하셨다고 하시니,
그것만 믿고 따르기가 너무 불안하다.
그것이 사람들이 신앙보다는 '제도나 재물'에 더 기대게 되는 이유다.
그래서 그 둘, '제도와 재물'은 친하다.
인생에는 메뉴얼이 없고, 더욱이 신앙생활에 메뉴얼은 없다.
지 팔은 지가 흔드는거고, 지 십자가는 지가 찾아서 메고 가는거다.
이런 불확실한 인생과 신앙에서,
우리가 할 일은 '능력치'를 키워놓아 어떠한 상황에도 유연하게 대처하게 하는거다.
삶의 능력치는 '시련'이 될 거고, 신앙의 능력치는 '용서'가 될 거다.
그래서 '시련'을 잘 견디고, 많이 '용서'하는 사람은,
완전 준비된 사람이다.
'고통'을 피하지 말고 받아들여라.
'용서'하라.
인생과 신앙, 즉 신앙생활이 훨 수월해질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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