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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앞에 항복

루가복음 18장의 부자청년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이제사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일 부자청년이 재산마저 버리고 돌아와서는 무엇을 더 해야 하느냐고 다시 물었다면,
예수님은 또 다른 도전거리, 이전보다 더 지키기 힘든 도전거리를 주었을 것이다.

문제는 '정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 해야 완성되고 보장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는 방향성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나'로 집중하려 드는 이 마음을
오롯이 하느님께로 돌려 드려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일부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 앞에 스스로 '항복'하기를 원하신다.

부자청년의 의도가 느껴지는가?
그는 하느님을 '정복'하고 싶어했다.
그분 존재 자체를 정복할 순 없더라도 그분이 원하는 것을 꼼꼼히 이루어내어서
그분의 요구조건을 다 채워보고자 하는 스스로의 원의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그러한 마음을 읽어내셨고
그에게 또 다른 벽을 주셨다.

우리는 하느님과 싸울 처지에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우리는 그분의 종들에 불과하다.
루카복음 17장에 좋은 비유가 나온다.
종이 주인을 위해서 뭔가를 했다고 해서 주인이 고마워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그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고 숙이는 수 밖에 없다.
그럴때 그분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는거다.
종에서 자녀로의 신분전환... 하지만 그건 우리가 해 달라고 떼를 써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건 하느님의 선물이지 우리가 하느님과 거래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래서 사실 신앙생활에는 정형화된 형식이란 것이 존재할 수 없다.
어느 어느 규정들을 채우면 '좋은 신자'라는 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깨닫는 모든 순간에 우리는 다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앞으로가 미친듯이 일에 매달리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의 평화'와 '사랑'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제 아무리 좋아 보이는 일을 하고 있어도,
울리는 징에 불과하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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