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요한 16,2)
정반대의 일을 하면서도 그 일이 좋은 일이라고 착각할 수 있는 이유는 그릇되이 형성된 신앙관에 의해서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적지 않은 이들은 서로 증오하고 이간질하고 다투고 싸우면서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둘러대고 있습니다. 죄인을 위해 죽으러 오신 하느님의 외아들을 모독하는 행위이지요.
눈에 드러나게 다른 이를 배척하지는 않더라도 자신이 지닌 어떤 위치나 타이틀 때문에 자신이 다른 이들 높이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 즉 교만에 빠진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내가 너보다 이런 부분을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스스로를 높은 위치에 두려는 사람, 그러면서 정작 자신보다 낮은 그들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기는 커녕 그냥 그 격차를 즐기는 이들이 있으니 이들은 영적으로 드높지도 않을 뿐더러 이기적이고 편협한 사고의 소유자일 뿐입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은 더 잘 봉사하기 위함입니다. 사제가 있는 것도, 수도자가 있는 것도 그들의 삶이 세상 사람들의 삶에서 분리되어 더 하느님께 집중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얻은 힘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더 잘 봉사하기 위함이지요. 헌데 그것을 망각한 채로 ‘분리’만 시킨다면 그것은 본래의 의미를 갈수록 상실해 가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되어가는 것이지요. 자신들의 직분이 고귀하여 사람들의 존경은 받지만 사람들에게 다가서서 하느님을 살갑게 전하려고 하지는 않는 이상한 이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들의 특징은 절대로 자신이 하는 일을 올바로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옳은 일이라는 신념이 이미 눈 앞을 가리워서 사랑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죽도록 증오하면서도 그것은 ‘정당한 증오’라고 둘러대는 것이지요. 자신의 마음이 어지럽고 평화가 전혀 없는데도 그 탓을 바로 내가 증오하는 그 대상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글을 보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거 봐,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니까’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좋은 나무에서 나쁜 열매가 맺히는 법은 없습니다. 모든 증오와 이간질, 시기, 질투, 분리와 같은 것들은 모두 나쁜 나무에서 나오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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