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가 사람들을 사로잡는 방법은 ‘공포’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공포에 빠지게 되면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고 속박 당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악마는 바로 그 공포를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구속시키는 것입니다.
악마적인 수단에 익숙해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이들을 겁에 질리게 해서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공포로 제압하려고 합니다. 헌데 이 악마적인 수단은 극단적인 수단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수단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 공포의 수단은 일상의 압박으로 이루어집니다. 엄마들이 자녀들과 ‘대화’하기를 포기하고 억압에 길들어가기 시작할 때에 그 방식에 익숙해지게 되면 그 엄마는 지극히 일상적인 범주 안에서 가장 악마적인 수단을 계속해서 쓰게 됩니다. 왜냐하면 대화하는 것보다 겁박하는 것이 훨씬 빠르고 쉽기 때문입니다.
또다른 악마적인 방식은 ‘기만’입니다. 속임수를 써서 상대의 선한 의지를 얻어내어 자기 목적대로 사용해 버리는 것이지요. 악마는 가장 거룩한 이들에게도 빛의 천사를 가장해서 원하는 목적, 즉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목적을 달성하곤 합니다. 물론 이 역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지극히 일상적인 범주로 이루어집니다.
자신이 아픈 척을 하면 다른 이들이 신경써주는 것을 알고는 자신의 아픔을 과장하는 것, 바로 기만의 한 방법이고 악마적인 방식입니다. 이런 식의 방식에 길들게 되면 일상이 늘 허품과 과장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실제로 그렇게 아프지 않은데 아픔을 과장하고 실제로 받은 피해가 그렇게 심하지 않은데도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끌어내기 위해서 억지로 과장하여 그들을 속이는 것입니다.
악마적인 방식에 휘둘리는 사람들은 그래서 언제나 뭔가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억압당하는 이들은 당연히 느끼는 것이고 기만당하는 이들도 사랑으로 뭔가를 해주기는 하지만 알지못할 찜찜함이 남아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들을 해방시켜 주는 일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마귀를 쫓는 능력’을 부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그들과 ‘다투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그들을 끌어안을 때에 그 악이 사그라들게 됩니다. 악에 대응한답시고 우리도 악에서 비롯하는 방식을 써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에게 매달려야 하며 그분의 십자가의 가치를 이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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