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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재 목적



핸들이 빠진 차는 그 무시무시한 속도로 가는 곳마다 들이 받으며 상처를 입힙니다. 물론 속도를 줄이거나 범퍼를 키워 충격을 예방할 수는 있겠지만 방향 자체가 상실되어 있기에 결국 어디든 가서 들이받게 되는 현실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방향을 상실한 인간은 바로 이와 같은 존재가 됩니다. 아무리 인격을 함양하고 아무리 속도를 제어하려고 노력한다 하더라도 결국 일은 일어나고 맙니다.

자동차는 어디를 가기 위한 뚜렷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그 자신의 고유한 뚜렷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하기 위해서 또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여기에서 반드시 언급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뚜렷한 목적을 지니고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돌려 드리기 위함이지요. 그리고 인간은 홀로 창조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관계 안에서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으라고 창조된 것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채우는 사람이고 올바른 길을 가는 사람이 됩니다. 반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훌륭한 외적 조건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결국 아무 가치도 없게 됩니다. 맛있는 빵을 만드는데 아무리 훌륭한 다이아몬드를 가져온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맛있는 빵을 위해서는 질 좋은 밀가루가 필요합니다.

인간은 분명 목적이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인간을 창조하신 분에게 여쭈어 보아야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미 그 목적을 뚜렷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우리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셨지요. 하지만 여전히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 이들이 존재하고 그로 인해서 방황하는 이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신앙인들은 자신들의 존재 목적을 올바로 깨닫고 나아가 아직 그 초대를 듣지 못한 이들을 열심히 초대해야 하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났으며 열심히 사랑을 키워 하느님에게로 돌아가야 하는 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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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들을 향한 악마의 공격에 대한 소고

사제들을 향한 악마의 공격에 대한 소고

먼저 사제들의 위치를 잘 알아야 한다.
사제들이 하는 일은, 사람들을 '성화(聖化)'
즉,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가까이로 가게끔 도와주는 것이다.
악마들로서는 치명적일 수 밖에 없다.
'거룩한' 사제들은 손짓 한 번으로 사람들이 자신들이 축복 받았다고 느끼게끔 한다.
축복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제가 마음을 담아 전하는 강복의 위력은 한 사람의 하루를 밝힐 수 있다.
그 밖에도 사제가 거행하는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는
그 사효성(일어나는 일 만으로 이루어지는 효력) 자체 만으로 위대한 힘을 지닌다.
그렇기에 사제들은 보통 사람들의 배에 해당하는 악마들의 유혹의 대상이 된다.

악마가 할 최선의 작업은,
그 사제직의 성스러움을 제거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악마들이 하는 짓은
사람들이 그 사제의 인간됨을 보고
코웃음을 치게끔 만드는 일이 우선이다.
결국 그의 모든 사제직의 직무수행마저도
사람들에게 "무의미"하게 보이도록 하는 게 주된 목적이다.

그래서 그가 가진 인간적 약점을 최우선의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그것은 '이성에 대한 욕구'가 될 수도 있고,
'재물에 대한 탐욕'이 될 수도 있으며,
'명예, 권력을 추구하는 마음'이 될 수도 있다.

누구는 이성을 돌처럼 바라보고 돈을 하찮게 여기지만,
다른 한편으로 은근히 명예욕과 지배하려는 마음이 대단할 수 있으며,
누구는 돈이나 명예, 권력에는 아무 관심이 없지만 이성에 대한 자신의 욕구를 견디지 못할 수도 있다.
또 누구는 '나은 생활', '윤택함'에 관심을 갖고 재물의 종이 되어간다.

사제직은 '나약한 인간'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으로서
우리는 그 인간이 아니라 그가 지닌 사제직을 존경할 필요가 있다.

악마의 목적은 그 '인간의 나약성'을 교묘하게 유혹해서 끝까지 드러내어
그가 지닌 '사제직'이 더럽혀…

[중요] 하느님을 알기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알고 싶어합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요. 뭔가 위대하고 거대한 분이 우리를 만드신 것 같은데 그런 분에 대해서 제대로 안다면 생을 살아가는 데에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그분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많은 시간 동안 하느님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외쳐대는 종교가 있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모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상황 자체에서 우리는 여러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은 그 자체로 알기 힘든 분이 아닐까요? 아니면 우리 자체 안에 그분에 대해서 알기 힘든 어떤 모종의 시스템이 존재하는 건 아닐까요?

첫번째 의문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당신 자체가 알기 힘든 분이 아닌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일단 하느님은 ‘무한’한 분이시고 ‘영원’하신 분이시니 ‘유한’하고 ‘한계’가 있는 우리가 그분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분을 아예 전혀 알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당신과 닮은 속성이 있어서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분에 대해서 알아 나가고 배워 나갈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지만 그분을 아는 것은 가능하다’ 정도로 전제하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번째 의문은 어떨까요? 우리 안에 하느님을 알기 힘든 어떤 시스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하느님을 알 수는 있지만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우리 가운데 존재합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빛을 바라보면 그것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지만 우리의 눈 앞에 우리가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선글라스’가 씌워져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교회는 이를 ‘원죄’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태초의 상태를 말하지요. 첫 인간의 범죄로 인해서 …

영적 면담의 구체적인 환경

영적 면담이라는 것은 일단은 서로 맞대면을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인간이 의사를 전달하는 데에는 오직 ‘언어’만이 그 수단이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대의 표정과 따스한 환대 등등 여러가지 면으로 서로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인터넷이나 전화로 상담을 하는 경우에는 많은 다른 인격적 부분들이 결여되기 때문에 면담의 방향이 엉뚱한 곳으로 치달을 수 있게 됩니다.

사제의 여성과의 만남은 굉장히 신중해야 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피치 못한 경우가 아니라면 가능하다면 여성분들은 가장 적합한 ‘여성 지도자’를 찾아주는 것이 좋습니다. 덕망 있는 수녀님이나 본당의 신뢰할 만한 여성 평신도를 추천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피치 못하는 경우라면 열린 공간을 확보하고 가능한 모든 추문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면담은 거의 한 번으로 끝나게 됩니다. 특히나 한국적인 현실 속에서는 ‘바쁨’이 일상화 된 지라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사실 예수님도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만나지는 않았습니다. 거의 한 두 번이 끝이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만남은 예수님을 마주한 이들에게 엄청난 영감과 색다른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고해소 이외의 환경에서 장기적인 면담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거의 모든 케이스는 한 번의 개인 면담으로 끝나는 것이 보통이고 장기적으로 한 사제에게 영적인 지도를 받기를 원하는 경우는 늘 이용할 수 있는 고해의 시간을 이용해야 합니다. 수도원이나 신학교, 또는 본당처럼 서로 같은 지역에 머무르지 않는 이상, 구역을 벗어난 곳에서 찾아온 내담자가 ‘장기면담’을 요청할 때에는 그가 사는 곳 주변에서 합당한 인물을 찾게 도와주는 것이 좋습니다.

영적 지도자인 사제는 스스로 ‘분별’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합당한 분별이 형성되지 않았을 때에는 고해소 외에 따로 다른 면담을 시도하는 것에 극도로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분별력이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고해소 밖을 벗어나 무언가를 시도한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