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허용범위



깔끔한 걸 좋아하는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청소 좀 하고 살아라!”
하지만 자녀들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열심히 치웠는데도 매의 눈을 가진 엄마의 눈을 피하기는 힘듭니다. 사실 자녀들은 큰 쓰레기만 치워 놓으면 평소의 생활을 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지만 엄마의 결벽증을 견뎌낼 수는 없는 셈이지요.

나라가 바뀌어야 한다, 여성을 대하는 남자의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 또 교회가 바뀌어야 한다고 시끌시끌합니다. 이런 종류의 목소리는 늘 있어왔고 세상은 그에 발맞추어 변화되어 왔습니다. 아픈곳에서는 신음이 나오게 마련이고 그 신음을 듣게 되면 움직임이 시작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 바뀌어야 할까요? 어느 선이 적정선일까요? 모든 이의 바람이 일시에 충족될 수 있을까요? 그 바람 자체는 정당한 것들일까요? 그런 여러 바람과 일들에도 하루는 지나가고 또 내일의 새로운 태양이 밝아옵니다.

하느님은 그 안에서 가장 활발히 일하고 계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요한 5,17)
하느님의 일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고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일은 세상 안에서 인간의 ‘이기심’에 좌우되지 않고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활동 안에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재앙’인 것도 포함이 됩니다.

하지만 자연이라는 것은 원래 정해진 힘의 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원래 그리 되도록 한 것인데 인간들이 탐욕으로 인해 뿜어대는 여러 결과물들이 거기에 영향을 미쳐서 재앙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인간의 죄악이 진정한 의미의 재앙인 것입니다.

저는 인터넷에서 뭐가 바뀌어야 한다고 외쳐대는 사람들을 크게 신뢰하지 않습니다. 뭐가 바뀌길 바라는 사람들은 실제로 자신의 삶을 필두로 무언가를 바꾸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바뀌어야 한다고 자기 게시판에 온갖 정치적인 글로 도배를 한다고 나라가 바뀌지는 않습니다. 나라는 실제로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바뀌어 나갑니다.

선한 이들은 이미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해 나갑니다. 자신의 삶에서 딱히 내비칠 것이 없는 이들은 타인이 자신을 믿게 하기 위해서 목소리를 높입니다. 하지만 가장 힘있는 말은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말만 하는 사람은 그것을 살아내는 사람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서로를 증오하고 칼날을 세우는 이 세상에서 십자가가 제 역할을 하는 이유입니다. 제가 하는 말들이 조금이라도 의미를 가진다면 그건 제가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을 ‘이론적’으로만 바라보면 결벽증에 빠지게 됩니다. 그들은 ‘완벽한 세상’을 꿈꾸지만 그건 현실감각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일순간에 모든 것이 개선될 수 없습니다. 다만 개선의 의지를 가지고 천천히 꾸준히 실천적으로 변화시켜 나갈 뿐입니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변화를 완성하는 사람은 그 변화를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