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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둥이가 퍼 준 물 한 그릇 (마진우 요셉 신부 作)



한참을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메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기가 마을인가 싶어서 달려가보면 오아시스의 환상이기를 여러차례... 그렇게 그 사람은 메말라갔고 기진맥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 그는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온 몸에서 힘이 솟아난 그는 그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달려갔습니다. 우물이었습니다! 그렇게나 간절히 찾아 다니던 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깊이가 꽤나 깊어 보였습니다. 지금 기력으로 저 우물벽을 타고 내려갔다가는 올라오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때마침 인기척이 들려왔습니다. 누가 이 야밤에 우물을 길러 온 모양입니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나에게 물 한 그릇만 퍼주시오!”
그러자 그는 아무말 없이 자신이 가진 두레박으로 우물을 퍼서 건네 주었습니다. 심하게 목이 말랐던 그는 그 물을 받아서 정신없이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두레박에 얼굴을 파묻고 물을 마시던 그는 그제야 혼미하던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뒤늦게 그 물을 건네준 이를 제대로 살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고맙... 아, 아니! 당신은!”
은은한 달빛에 비춰진 그의 모습은 기괴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한쪽 눈은 눈이 있었던 빈 자국만 남아 있었고 얼굴 피부는 흐느적거리는 고무를 얹어 놓은 모습이었습니다. 팔은 더러운 붕대로 얼기설기 휘감아 있었는데 손가락은 엄지와 검지 뿐이었고 나머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문둥이잖아! 에이 제길!”
그 사람은 갑자기 성질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마치 더러운 것을 만지기라도 한 듯이 온 몸을 쓸어 내리면서 그 자리를 벗어나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문둥이는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그런 취급은 그에게는 일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나그네는 이내 길을 멈춰 섰습니다. 왜냐하면 이 밤에 자신은 길을 모르고 있었고 그 문둥이는 이 야밤에 물을 길러 나온 걸로 보아 마을까지 가는 길을 알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다시 발길을 돌려 우물이 있던 곳으로 향했습니다. 다행히 문둥이는 아직 거기 있었습니다.

“이... 이보시오. 마을까지 가는 길을 좀 안내해 주시오. 내 사례는 두둑히 하리다.”
“사례는 필요 없으니 따라 오시오. 안내하겠소.”

그리고 두 사람은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앞에는 물을 찰랑거리면서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문둥이가 뒤에는 거리를 두고 그 나그네가 행여 멀어질세라 문둥이를 열심히 쫓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수시간이 흘렀고 마침내 마을에 다다랐습니다.

“다 왔소. 살펴가시오.”

그리고 문둥이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나그네는 문둥이를 불러 세웠습니다.

“이... 이보시오.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제가 감사의 의미로 사례를 하도록 해 주시오.”
문둥이는 멈춰서서 뒤돌아섰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저에게 별다른 것은 필요가 없소이다.”
“하지만 나는 사례를 하고 싶소. 나는 근처 마을 지역 관리의 아들이라오.”
“그러시오? 그럼 나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당신은 내 생명을 구해 주었으니 은 다섯냥을 드리겠소.”
“나는 괜찮으니 필요한 이에게 주시오.”
일말의 고민도 없이 거절하는 그 문둥이를 보자 나그네는 당황스러웠습니다. 거기에 슬슬 자존심이 상하는 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이보시오, 지금 당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요?”
“나요? 보면 모르겠소?”
“알지요. 당신은 문둥이요.”
“그렇소.”
“그러면 문둥이 답게 처신하시오!”
나그네는 화가 나서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문둥이는 그대로 한참을 나그네를 바라보며 서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내가 문둥이답게 처신했더라면 당신은 저 사막에서 죽음에 이르렀을지도 모르오.”
그러면서 문둥이는 겉옷을 벗었습니다. 그 칙칙한 옷 속에는 굉장히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 나라의 왕의 아들이오. 안타깝게도 문둥병이 나를 덮쳐 왕궁에서 숨어 살고 있소. 그것이 내 운명이라는 것을 나는 받아들이오. 그러나 어제 저녁 나는 빛으로 오신 주님을 뵈었소. 그분은 나에게 당신을 위해서 물을 떠오기를 명하셨고 나는 한참을 저항했소.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던 것이오. 그러나 결국 다시 마음을 바꾸고 순명하기로 했고 이 야심한 밤을 선택한 것이오. 그리고 당신을 만나게 되었소.”
나그네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눈 앞에 왕의 아들을 두고 있었고 또 자신의 무례한 일련의 행동들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나는 당신에게 해코지를 할 생각이 전혀 없소. 그러나 앞으로는 나와 같은 사람을 보거든, 또 그 사람에게 사소한 도움이라도 얻게 되거든 감사하기를 배우시오. 그것이면 족하오. 문둥병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괴로운 것이라오. 그럼 잘 가시오.”
문둥이는 다시 겉옷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물동이를 지고 걸어갔습니다. 나그네는 할 말을 잊은 채로 한참을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댓글

젤리님의 메시지…
뭔가 신비로운 분위기의 ,아름답고 슬프기도 한 글이네요!
왕의 아들이라는 신분이지만,누군가에게 물을 길어줘야 할 운명..
운명에 저항하지만 결국 받아들이고,..댓가도 바라지 않고 구름에 달 가듯🌛 초연히 떠나가는..
의미심장한 내용~
잘 읽었습니다~신부님~^^
김아가다님의 메시지…
처음글에서 해골물을 마신 원효대사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본질을 잃고 사는 때가 많음을 반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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