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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0의 게시물 표시

복음을 전하러 왔다

교회는 살아있는 지체가 되어야 한다. 살아있는 존재는 주변과 상호작용하면서 가장 나은 상태를 지향한다. 교회 역시도 살아있다면 그러해야 한다. 새로운 영세자가 줄어가고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더는 교회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무심함을 반복적으로 비판만 하고 있는 것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해보니 안되더라고 번복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바지가 물에 젖어 축축하고 그게 불편하다고 느껴진다면 벗어서 말려야 한다. 그냥 입고 있으면서 내 바지는 왜 이렇게 축축한가 하고 한탄만 해서는 안된다. 유사종교의 현실은 사람들의 내면에 영적 갈망이 실재하고 있다는 것이고, 지금의 교회는 그에 발맞추어 사람들이 갈망하는 부분을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 사실 그것이야 말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의 핵심이다. 복음은 교리서 한 권 옆구리에 끼고 다가가서 지루한 설교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배고픈 이에게 빵을,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고 억압 당하는 이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늘상 해오던 일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그래서 무언가를 새로이 시도한다는 것을 두려워한다. 자신의 편의와 안락이 파괴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기득권과 특권이 무너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진정 신앙이 있다면, 참으로 올바르게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거룩한 심판이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의 상실이 아니다. 이제 새로운 판을 짜기 쉬운 시기가 다가왔다. 기존의 마냥 당연하기만 한 것들이 이제는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되었고 여러 면에서 새로운 형태로 발전해야 하고 그것을 고민해야 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만일 교회가 이대로 옛 것에 머무르기만 한다면 성령은 돌에게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들어 내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찰하고 고민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면 성령은 우리를 도와 백배 천배의 열매를 얻게 해 주실 것이다. 교회는 복...

하고픈 일, 잘 하는 일, 해야 할 일

내가 하고 싶은 일과 잘 하는 일, 그리고 내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은 서로 다른 결을 지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이에서 서로 혼동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이런 문제를 고민하는 이유는 많은 경우에 내가 겪는 일들은 대부분,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잘하고 못하고는 사실 부차적인 일입니다. 잘 해도 하기 싫은 일은 하기 싫을 뿐입니다. 반면 못해도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싶게 마련이지요. 반면 잘하고 못하고와 상관없이 해야 할 일이 나에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내가 하기 싫은 일이지요. 내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 내가 잘 하는 일이 되고 동시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된다면 가장 환상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기술적인 측면이나 일의 강도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의지'의 문제가 됩니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내가 욕구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나의 욕구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지만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게 됩니다. 나 스스로의 인간적 욕구에 사로잡힌 사람과 나의 욕구를 다른 거룩하고 드높은 의지에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스스로의 욕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이 굉장히 한정적입니다. 그리고 적게 노력하고 가장 많은 인간적 이득(돈, 명예, 권력)이 보장된 것을 선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보이는 직업들을 선호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연예인들이 얼굴만 반반하면 출연료 수억을 받고 영화를 찍는 걸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너무나 단순하게 주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이면에는 일반인들이 전혀 상상도 못하는 현실들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우리 각자가 지닌 의지를 '거룩한 의지'에 동참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일들을 거듭해 나가면서 점점 그 일들을 잘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근본...

이 또한 지나가리라

지구상의 모든 일들이 그러하였듯이, 영원한 일은 없고 결국 지나가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그 교훈을 마음에 새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다시 나뉠 것이다. 하느님의 기회는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가 분명히 체험하고 느끼도록 하지만 결국 그 사건을 통해서 무언가를 쥐느냐 마느냐의 결정은 우리 스스로에게 달린 문제가 된다. 그리고 적지 않은 이들은 예전에 하던 악습을 고스란히 반복할 뿐이다. 부활은 사순을 지워 버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활의 기쁨을 통해서 사순을 적극적으로 맞아 들이도록 하는 초대가 된다. 그러나 잠깐의 수난 흉내를 내버린 사람들은 부활이 오면 어느새 사순의 태도를 상실하고 마냥 기쁨을 만끽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 숨쉬고 사는 동안 '안정'이라는 것은 일시적인 환각일 뿐이다. 삶의 모든 요소는 우리에게 도전이 되고 진정한 평화는 오직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몫이다. 돈을 욕심내다가 결국 가진 것을 모두 잃고 쓰러지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오늘도 새로이 돈에 대한 욕구를 저버리지 않는다. 권력도 명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서 '성공'이야말로 최고의 가치인 듯이 사람들을 속이곤 한다. 젊은 시절 영화를 누리던 미모의 여배우가 늙어서 주름지지 않는 법은 없다. 성형의 기술이 아무리 좋아져도 청춘의 생기를 회복하지는 못한다. 여러가지 증거들이 우리의 눈 앞에 펼쳐져 있고 보려는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보이는 일이 된다. 그러면 우리는 본질을 추구하기 위해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영혼의 가치는 색이 바래지 않고 값이 떨어지는 법이 없다. 성경은 여전히 그 지혜를 감추고 있으며 귀 있는 자에게는 얼마든지 들려줄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 혼돈의 시대에 자신의 귀를 열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자 누구이겠는가?

무엇을 받았는가?

사랑을 많이 받아야 사랑을 합니다. 아주 당연한 이치입니다. 아무도 체험하지 못한 것을 할 수 없고 자신이 소유하지 못한 것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랑을 많이 받아야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정말 사랑을 받지 못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사랑의 축에 들어갈 것인가 하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사랑해 주어도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에게는 무용지물이니까요. 그래서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의 자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값비싼 제품'이나 '엄청난 재화'가 다가와야만 사랑 받는다고 느끼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원래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이며 우리가 지녔다고 생각한 많은 것들이 사실은 거저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상당히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지금 제가 적은 글을 볼 수 있는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사용하고 계신 것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만한 문명의 혜택 속에 살아가는지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끊김없는 전기가 있다는 이야기이고 인터넷이나 LTE, 3G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며, 또한 그것을 볼 수 있는 단말기가 있다는 말이니까요. 그러나 항상 이런 혜택 속에 머물러 온 이들에게는 별로 새삼스러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전쟁의 위협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것, 내가 일과를 마치고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매달 배를 곯지 않을 정도의 수입이 있다는 것 등등이 모두 이미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얻고 있다는 증거가 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탐욕과 이기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여전히 '더 많이, 더 많이'를 외쳐대고 있는 셈입니다. 충분히 받은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나누는 것'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