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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4의 게시물 표시

착한 목자

신학교 시절 '작업' 시간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신학생들이 수가 많았기 때문에 신학생들이 신학교를 가꾸는 작업들에 동원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작업의 종류는 다양했지만 자주 했던 일은 신학교 정원에서 자라는 잡초를 뽑아내는 일이었습니다. 잡초를 뜯다 보면 때로는 그 뿌리가 어마어마한 것에 놀라곤 합니다. 그리고 그런 커다란 잡초를 뜯다가 잔디도 같이 뜯기는데 잔디는 위에서는 저마다 작은 풀처럼 솟아나 있지만 아래에서는 서로 강한 줄기로 연결되어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서로 강하게 연결된 잔디처럼 우리 역시도 한 주님에게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들입니다. 목자가 양들을 안다는 것은 그 내적인 유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발가락과 손가락이 우리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는 것처럼 하느님을 믿는 이들,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아버지와 그리고 우리의 목자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요한 10,14) 젊은 시절 술자리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그렇게 밤늦게 모여서 서로 우정을 다지는 것이 엄청 중요한 일이었고 그렇게 형성된 우정이 영원히 이어지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삶의 터전이 달라지면서 몸이 멀어지면 자연스레 마음도 멀어졌고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조차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오늘 처음 만나도 평생을 만나 온 것 같이 마음이 이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비록 사는 곳이 다르고 출신지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다르지만 내면 속에 같은 떨림, 진동을 공유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같은 양들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성당 사람이라고 모두 같은 양 떼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다단계를 하면서 그 수단으로 성당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고 다른 세속적 목적으로도 얼마든지 성당을 다가서는 사람은 있습니다. 목자의 목소리를 제대로 알아듣는 이라야 한 목자 아래에 있는 한 양 떼가 될 것입니다. 그런 이들 가운데에는 아직 교회의 울타리 안에 들어오지 않았...

세상은 그분을 안 적이 없다

강렬한 체험을 한 사람은 그 체험을 평생토록 잊지 못합니다. 누군가에게서 들은 한 마디의 말이나 단 한 번의 경험은 평생을 두고 그에게 남아 있습니다. 사실은 하느님 체험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하느님을 제대로 체험한 사람은 그 체험을 평생을 두고 기억하게 되고 그 기억을 바탕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은 하느님을 알고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렇다 할 만한 하느님의 체험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딱히 기억할 것도 없습니다. 그들의 기억은 세속의 삶에 기반한 것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는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라고 부를 만한 기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성당을 다니는지 안 다니는지, 혹은 세례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가 그 체험의 기준점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성당 안에서도 얼마든지 세속적 체험을 기반으로 한 삶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이들은 성당 안에서 자신이 원하던 형태의 것이 사라지고 나면 더 이상 성당을 다닐 이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에 냉담에 빠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커피를 마시러 왔는데 커피가 다 떨어지면 거기에 있을 이유는 없는 거니까요. 하느님의 체험을 한 이들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마련해 주시는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때로 세상 사람들이 보았을 때에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삶의 형태를 유지하고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들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말하기 일쑤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서는 어리석은 삶이 분명합니다. 일요일에 집에서 쉬어야지 왜 쉬는 날까지 성당에 가야 하는지 세상적인 기준에서만 보자면 이유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과거에는 성당에 가면 현세적으로도 즐길 것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러한 이유들이 더욱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굳은 '믿음'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

성소(聖召) - 거룩한 부르심

성소(라고 하면 신자들은 대부분 사제 성소나 수도자 성소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중심이 되어야 할 성소는 어찌보면 결혼 성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교회의 7성사 가운데에는 친교에 봉사하는 성사로 혼배와 성품 성사가 있습니다. 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것만이 성사, 즉 거룩한 일이 아니라 혼인 생활을 잘 이끌어 나가는 것도 거룩한 일입니다. 혼인이 성사인 이유는 그것이 부르심 받고 응답하는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즉 개개인이 서로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신앙인으로 이 땅에서 완수해 나가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혼인 생활에는 좋은 것만이 있을 수 없습니다. 혼인 생활은 배우자가 죽음으로써 마무리되기까지 지고 가야 하는 거룩한 사명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령 강림 이후에 자신에게 주어신 소명을 이행합니다. 오늘 독서의 그의 말 안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착한 일을 하고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는가' 하는 문제로 인해서 법정에 서고 신문을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감옥에도 갇히고 박해도 당하는 것을 마치 당연한 일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님도 그와 같은 처지를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현대에는 여러가지 이유로 결혼 자체를 하지 않는 풍조가 있고 자녀를 출산하는 것을 꺼리기도 합니다. 현실적으로 계산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닙니다. 지금의 사회는 여러가지 면에서 가정을 꾸리는 것을 쉽지 않은 일로 만드는 이유들이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혼인 성소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혼인은 신앙 안에서 주어지는 일종의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동참하고자 애쓰는 이는 어떻게든 이 소명을 받아서 살아갈 것입니다. 혼인은 단순한 애정의 끌림이나 현실적인 계산이 아닙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혼인은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영혼의 질병이 어려운 이유

몸이 아프면 즉각적으로 느낍니다. 그리고 그 치유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사라는 직분에 대해서 남다른 시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프던 몸이 그를 만나고 나면 개선되는 것이 체험되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질병의 문제는 내가 아픈 줄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한 어린 영혼이 세속이라는 가치에 물들어 화장을 한껏 하고 그걸 인스타에 올리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갈구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 아이가 아프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 나이대에 그럴 만한 일이라고 하고 쉽게 넘어갑니다. 사람의 가치를 자신에게 값비싼 선물을 해 주는 기준으로 식별하고 있는 한 사람의 영혼을 알아볼 방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본인 스스로도 그것이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재산상의 문제가 생겨서 형제간에 싸움이 나도, 누군가에게 극도의 시기를 느껴서 그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며 다른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그에 대한 험담을 하는 사람도 자신의 내면이 어떻게 아픈지 알지 못합니다. 만일 안다면 치유하고 싶어질 것이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사울은 유대인의 핵심 도시인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자신이 자랑스러운 율법의 아들이고 자신이 하는 행동은 그 자랑스러움을 더해주는 훌륭한 행동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스스로 아프다고 생각하기는 커녕 도리어 자신이 하는 일을 뿌듯해 하고 열정과 더불어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가는 고을마다 통곡 소리가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사로잡힐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반면 필리포스는 당대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의 구역이었던 사마리아로 내려가서 그곳에서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필리포스는 사람들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고 중풍 병자와 불구자를 낫게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고 이야기합니다. 내 영혼의 상태를 볼 수 있는 하나의 지표로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내 ...

반대하다

반대하다, 반항하다, 반기를 들다 모두 비슷한 표현입니다. 누군가가 하는 일에 대해서 그것에 동의하지 않으며 역행하는 생각을 가지고 그것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1독서에서는 스테파노와 그에 대항하는 이들이 등장을 합니다. 백성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이라고 표현됩니다. 백성은 평범한 사람을 말하고 원로는 명예로운 이들을 말하며 율법 학자들은 학적 권위를 지닌 이들을 말합니다. 이 세 계층이 하나도 예외 없이 스테파노에게 반기를 들고 있습니다. 이렇게나 강하고 광범위한 반대 속에서 스테파노는 용기를 잃을 법도 한데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끝까지 그들에게 자신이 전해야 하는 말을 합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분노를 참지 못해 스테파노에게 물리적 제재를 가합니다. 그리고 스테파노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합니다. 나아가 그렇게 하고 있는 이들의 용서를 구하기도 합니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이미 그 시작점에 내적인 반대가 선재합니다. 세상의 모든 외적인 형태의 악은 이미 그 내면에서부터 시작된 진리에 대한 반항이 존재하는 셈입니다. 세상은 복잡한 듯이 보이지만 의외로 단순한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진리를 쫓는 사람들과 그 반대에 서 있는 사람들로 나뉘어집니다.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 그렇지 않은 이들의 부류는 다양하고 다채롭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욕구'가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복음에서도 유사한 대립구도가 발견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진정한 빵을 주시는 분'을 소개하고자 하고 군중은 '빵'을 섬깁니다. 그래서 둘은 '빵'이라는 유사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주고 받는 셈입니다. 군중은 자신의 욕구를 채워줄 세속의 빵을 예수님께 달라고 하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대로 우리를 구원에 이끌어 줄 하늘의 빵을 받아 먹으...

무엇으로 예수님을 알아볼 것인가?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막달레나의 경우는 눈물에 눈이 가려서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통해서 우리는 그분이 그들과 한참을 걸어가는 데에도 알아볼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외적 용모로' 알아보는 일은 쉽지 않았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단순히 그의 외모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의 행동 습성과 말투를 통해서 그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이 알 수 있도록 구멍난 손과 말을 보여주시고(외견의 유일한 남은 징표) 나아가서 부활하셨음에도 그들 앞에서 구태여 먹을 것을 찾아 물고기를 잡수시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알아보는 일은 여기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실 '영으로' 누군가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성령에 힘입은 이들은 '동일한 의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드러납니다. 먼저는 하느님 말씀의 선포와 완성에 힘쓰는 것입니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두번째는 성경에 기반한 복음의 핵심 선포를 가르치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세번째는 진리의 선포, 즉 선교에 대한 노력입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노선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를 알아볼 수 있는 셈입니다. 사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더이상 당신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에게서 멀어지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가까이에서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십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보내시는 협조자의 영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앞서의 의지를 담...

계명을 지키다

“나는 그분을 안다.”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1요한 2,4) 우리가 훗날 가게 될 하늘 나라는 간단하게 말하면 하느님의 집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의 집에 들어가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가장 자연스럽고 완전한 방법은 그 집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집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자기 집에 들어가는 사람을 두고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신앙이라는 것은 다양한 표현이 존재할 수 있겠으나 이렇게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과의 친밀함'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양자로 편입되어 식구로 들어올 수는 있지만 문제는 서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친근함', '친교'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나는 천주교 신자라고 할 때에 그가 천주교 신자인지 알아보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교적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를 알아볼 수 있고, 가톨릭 문화나 신학적 지식을 얼마나 갖추고 있는지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필요한 일이고 하느님은 전혀 다른 것을 보십니다. 하느님은 숨어 있는 것을 보시는 분으로서 우리의 내면을 관찰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과 친교가 얼마나 형성되어 있는지를 바라보십니다. 그것이 '계명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정해져 있는 율법 규정을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지키는가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 계명을 근본적으로 제시하시는 하느님의 가장 내밀한 영역에 얼마나 진정으로 동의하는가 하는 것, 즉 하느님과의 친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일도 없으면서 친한 시늉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속일 수 있어도 하느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계명을 올바로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느님과 진실한 친교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훗날에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당신의 집에 그분의 아들과 딸로 들...

욕구에 따라서 움직이다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살인자를 풀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사도 3,14-15) 사람은 복잡한 것 같아도 단순합니다. 저마다 '욕구'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문제는 그 욕구가 다양한 차원에 걸쳐져 있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빵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즉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우선됩니다. 그래서 사탄도 예수님을 빵으로 유혹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이들이 여기에 걸려 넘어집니다. 그리고 이어서 고차원적인 욕구가 존재합니다. 명예와 관련된 자아실현의 욕구와 같은 것입니다.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설령 밥을 안 먹어도 내가 지금껏 쌓아 온 명예가 실추되는 것은 못견디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아가 악마는 결국 '나자신'이라는 것을 숭상하도록 합니다. 최종 권력에 대한 욕구를 바탕으로 한 유혹이자 하느님을 앞에 둔 인간으로서 갖게 되는 유혹을 의미합니다. 첫 인간이 걸려든 유혹이기도 합니다. 이런 다채로운 종류의 유혹들 앞에서 인간은 '의로우신 분'의 초대와 그분에게서 얻는 진정한 영광,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그분 자체를 거부하게 됩니다. 그것이 진리를 죽이는 방식이며 생명의 영도자를 죽이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압니다. 하느님은 죽은 그분을 당신의 권능으로 살리시고 다시 우리 앞에 내어 놓으십니다. 이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세상의 이끌림에 따라서 영원을 저버리는 선택을 할 수도 있고 반대로 하느님을 향한 꾸준한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미 우리는 선택한 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사도 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