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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5의 게시물 표시

습관화된 고해의 위험성

세상은 참 아이러니합니다. 사람들은 돈벌기를 원하지만 동시에 돈을 많이 번 사람이 무너지는 꼴을 보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죄를 추구하면서도 그 죄를 단죄하는 셈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주변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죄가 없다는 게 아닙니다. 그녀는 죄인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주변에 그녀를 단죄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그 여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간파했고 그것으로 여인을 돌팔매에서 구해 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간결했지만 핵심적이었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나이 많은 이들, 즉 자신의 삶에서 수많은 오류를 경험한 이들부터 시작해서 하나 둘 씩 떠나갑니다. 여인의 죄는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인을 용서하십니다. 다만 한 가지 전제가 있으니 그것은 우리가 얼마 전에 배웠던 것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이 말은 앞서 38년을 앓아 온 사람에게 한 말과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더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여인은 다시 한 번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결된 결말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부터 여인에게 달린 일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이 체험으로 다시는 죄악으로 다가서지 않을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이번 기회를 무사히 넘겼으니 다시 새로운 죄의 대상을 물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 이상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에게 이 장면을 보여주고 우리에게 결정하게 여지를 남겨둡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해를 봅니다. 그러나 때로 그 안에서 절박함이나 진실성을 찾기 힘든 경우도 많이 봅니다. 그저 습관화되고 의무적인 고해를 보는 사람이 많고 다시 얼마든지 같은 죄를 반복할 의도가 다분한 사람들을 자주 만납니다. 예수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누가 들어오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사...

상대적 가치

우리는 가치가 변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어릴 때에 정말 갖고 싶던 장난감을 어른이 되어서 돌아보면 왜 저런 것을 그토록 갖고 싶어했나 의아해 하기도 합니다. 결혼도 하기 전에는 이 사람 아니면 죽을 것처럼 하다가 결혼하고 나면 이 사람 때문에 죽겠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에서 만나는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고 변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초월적인 가치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가치 앞에 놓인 세상을 일컬어 '쓰레기'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세상 것들이 모두 쓰레기라는 말이 아니라 영원하고 초월적인 가치를 앞에 두고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상대적인 평가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지닌 가치를 지닌 사람에게 세상은 비슷한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미 그 힌트를 조금씩 보여 주십니다. 모든 이가 세상을 떠나게 되고 세상에서 누리던 것을 하나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엄연한 진리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하지만 모든 이가 같은 가치를 지닐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는 고집스럽게 세상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그런 이들을 앞에 두고 안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행위에 따라서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세상에 다른 가치, 초월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들이 받아들이든 말든 그들 앞에서 그 가치를 전해준 사람이 있다는 것은 기억할 것입니다. 때가 차면 우리는 뒤에 남겨진 것들을 내버려두고 다시 앞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서 하루 하루 열심히 달려야 합니다. 

새 일

광야에 길을 내다 광야는 메마르고 험한 곳입니다. 그곳에는 강도들이 사는 곳이고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주님은 그곳에 길을 내어 사람들이 길을 찾게 하고 안전하게 걸어가도록 도와 주십니다. 사막에 강을 내다 사막은 물기가 하나도 없는 곳입니다. 현대 사회는 영적인 사막과 같은 곳으로 저마다 스승이라고 외쳐대며 많은 것을 가르치려고 들지만 그 안에는 주님의 참된 생명의 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 주님은 그 사막에 물길을 마련하시고 강물처럼 그것을 흐르게 하십니다. 누가 와서 마셔도 전혀 줄지 않는 물을 주십니다. 들짐승들과 승냥이와 타조들도 나를 공경한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짐승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그 짐승들도 참된 것에 대한 감각은 살아 있어서 남다른 일을 보면 감탄할 줄 알고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을 공경할 줄도 압니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욕하고 있었지만 정작 로마의 백인대장은 그분의 본모습을 이해하고 경외한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이런 이들을 구하러 왔고 그들을 선택한 백성으로 삼을 것입니다. 반면 자신들이 안전한 영역에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은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 것입니다. 이런 일은 지금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에 대한 찬양을 전하다 찬양이라는 것은 사실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이는 조작된 행동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전례의 해를 살고 있지만 사실 전례라는 것의 본질은 우리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찬미입니다. 이 본질이 존재하지 않으면 전례는 딱딱하게 굳어진 행동이며 그저 전례에 대해서 조금 더 아는 것이 하나의 스펙이 되어버려 교만에 사로잡히게 하는 수단에 불과하게 됩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그들은 선택받은 민족이 될 것입니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눈이 머는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가장 기본적으로는 눈이 손상되면 멀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눈이 멀게 되는 이유는 아닙니다. 눈이 멀쩡해도 누군가가 눈을 가리면 눈이 멀게 되고, 또 눈이 볼 수 있는 빛이 사라져도 눈이 멀게 됩니다. 영혼에게도 유사한 일이 일어납니다. 영혼은 원래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 마음은 사람들의 빛에 깨어 있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돈에 눈머는 영혼은 없습니다. 어릴 때에는 돈이 뭔지도 모릅니다. 그때에는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눈멀기 시작하면 그런 순수했던 영혼의 상태가 변질되게 됩니다. 그리고 돈의 가치에 눈뜨기 시작하면 도리어 영혼의 본질적인 눈이 가리워지게 됩니다. 그러면 돈 때문에 사람을 증오하게 되고 탐욕으로 인해서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악은 영혼을 눈멀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을 살리려는 사람에게 살기를 띠게 되고 반대로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을 분별없이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의인은 철두철미하게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의인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 의로우신 분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의인은 자신의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의인은 의로움이 시키는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런 의인은 악인의 표적이 됩니다. 악인은 그런 의인을 한편으로 시기하고 한편으로 증오합니다. 그래서 그에게 갖은 모욕과 고통을 선물하려고 합니다. 악은 그렇게 사람들의 영혼을 눈멀게 합니다. 무서운 세상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상급은 이곳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원의 자녀들이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받아들여 당신 품 안에 안아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상급이 될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구원을 추구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구원을 어떤 식으로든 바라본 사람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배우는 존재입니다. 한 번도 보지 못했고 한 번도 듣지 못했으면 그에게는 눈 앞에 있어도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인간이 영원을 추구하게 되는 것은 그 영원이라는 가치를 어떤 식으로든 볼 수 있었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은 외견에만 달려 있지 않습니다. 아름다움은 오히려 내적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존재는 객관적인 수치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름답다고 가치를 부여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우리 고유의 생각 없이 주변 사람들의 가치를 뒤쫓을 때에 우리는 헛된 아름다움을 추구해서 나의 소중한 몸에 몹쓸 짓을 하기도 합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아들을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그 아들을 보낸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 아버지는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까지 더 큰 일들까지 모두 보여 주십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보여 주시는 것을 받아들여 지금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꼬마 아이가 기껏 볼 수 있는 것은 자기 눈 앞에 놓인 사탕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 꼬마 아이에게 그 아이가 자라서 크게 될 모습을 그려줄 수 있는 풍부한 상상력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말을 신뢰함으로써 아이는 자신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게 됩니다. 신앙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한 줌 사탕에 불과한 이 세상을 추구하느라 진을 뺍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영원의 미래상을 그려보일 수 있어서 그를 신뢰한다면 여러분의 삶은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복음 선포자는 이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들이신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 예수님을 보낸 아버지를 신뢰해서 그분들이 보여주시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이고 구원입니다. 누군가 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좌절...

죄와 나쁜 일의 연관성

예수님은 그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사람이 좋지 않게 변해가는 데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삼구를 말합니다. 세속, 육신, 마귀입니다. 이 세 가지는 나름의 특징으로 인간을 하느님에게서 떼어놓고 어둠에 빠져들게 합니다. 그러한 것들로 인해서 우리가 저지르게 되는 것이 죄입니다. 세속에 이미 찌들어 있는 사람은 세속이 더이상 유혹이 되지 않겠지만 하느님을 찾으려는 사람에게 세속은 끊임없는 유혹이 됩니다. 마치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이집트를 그리워 한 것처럼 세속은 하느님을 향해 여정을 떠난 이에게 끊임없이 돌아오라는 유혹을 던집니다. 육신은 그 기본적인 필요를 떠나서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육신은 항상 영혼이 나서야 할 때에 멈추도록 유혹합니다. 더 쉽고 더 편한 것을 찾아서만 살아가도록 우리를 유혹하여 우리가 말씀의 봉사자가 되거나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데에 의욕을 꺾으려고 합니다. 마귀는 아주 교묘하게 하느님에게서 우리를 멀어지게 만듭니다. 심지어는 거룩한 것을 이용해서라도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합니다. 마치 열심히 성당 활동을 하는 듯이 보이게 하여 우리를 착각하게 하고는 실제로는 하느님 아닌 것을 추구하게 해서 우리를 더욱 교만하고 허영에 가득차게 만드는 일도 허다합니다. 이런 죄는 우리를 타락시키는데 그 타락상은 영혼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육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과한 술은 간을 상하게 하고, 지나친 쾌락의 추구는 그 기관을 망가뜨리기도 합니다. 건강에 좋다고 먹어댄 것이 도리어 부작용을 일으켜 반신불수가 되게 만들기도 합니다. 모든 장애가 죄의 결과는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사람은 다름 아닌 죄의 결과로 육체의 괴로움을 얻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낫게 하십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깁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