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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거룩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의 생이 그 내면의 변화에 따라서 전혀 다른 양상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의사라고 다 같은 의사가 아니며 아버지라고 다 같은 아버지가 아닌 셈이다. 정말 열정을 지니고 사람을 살리려는 의사가 있는가 하면 그저 가능한 자신의 안락을 추구하면서 기회만 되면 쉬려고 하고 그러면서도 돈은 많이 받으려고 하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의사도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도 단순히 그 외적인 껍데기가 ‘종교적’이라고 해서 모두가 종교적인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일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떻게 이루어져 가는가 하는 것을 올바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원래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 목적에 맞게끔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하며 행여 변질된 것이 있다면 바로잡아 나갈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굉장히 신중해야 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 맡고 있는 교회 공동체 안의 역할이 존재한다. 내 역할이 아닌 것을 함부로 넘어다보면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우리는 우리가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고 참여 가능한 공동체 안에서의 일부터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한 평신도는 엄연히 한 소공동체의 일원이고 또 자신의 능력 안에서 한 단체의 일원이 된다. 그렇다면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어떤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적어도 자신의 가정에서부터 일을 시작해야 하고, 또 심지어 이도 저도 그 어떤 곳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그것이 가능하다면) 자기 자신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신이 충분히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그 안의 구성원들을 기쁨으로 초대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대 공동체를 바라보면서 투덜거리기만 하는 것은 일종의 책임 회피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거대한 덩어리가 순식간에 바뀌는 일은 없기 때문에 투덜대는 사람으로서는 가장 좋은 핑계거리, 즉 자신이 직접적으로 속한 공동체에서 일하지 않고 투덜거릴 수 있는 훌륭한 핑계거리를 지닌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자신이 속한 소공동체나 단체에서 정말 성심을 다해 적극적으로 일을 시작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 작은 공동체의 변화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직접적인 영향권 내에 들어있는 이들에게 훌륭한 메세지를 전할 수 있게 된다. 즉,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타인의 기쁨을 이끌어내는 작은 예수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일은 그렇게 시작된다.

교회는 이 복음의 메세지가 전해질 수 있도록 일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은 내가 속한 공동체, 내가 참여할 수 있는 공동체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그것은 타인의 변화를 기다리면서 투덜거림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적극적인 복음 메세지의 선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전체 교회 안에는 실천적으로 복음의 메세지를 전하는 소수 외에 수많은 군집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신앙’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이들이다. 그들의 목적은 참으로 다양한데 누군가에게 그것은 돈에 대한 탐욕일 수 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권력에 대한 추구,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명예일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추구의 양상들이 얽히고 설키어 거대 단체가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수난 앞에서 카야파가 대사제로서 예언을 한 것처럼 그들 모두의 오류는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서 결국 최종적인 선을 향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물론 저마다 차지하게 되는 자리 안에서 각자가 받게 되는 결과물은 전혀 다를 것이 분명하다. 즉, 선을 실천한 이, 의로움을 위해서 박해를 당한 이는 그에 상응하는 상급을 받고, 반대로 선에 맞서서 활동한 이, 즉 자신의 이기성과 탐욕을 한껏 발휘했던 이는 그에 상응하는 결과물을 얻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통해서 전체 교회는 굴러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움직임 가운데 ‘신앙적으로 포장된 사업’이 존재하니 그것을 잘 분별해야 한다. 이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외적 껍데기는 굉장히 종교적인데 그 내용은 실제로는 ‘사업’을 하는 일을 말한다. 그리고 그 사업의 이유는 신앙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이를 올바로 분별하기 위해서는 과연 신앙이란 무엇이며 교회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단체인가를 올바로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교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분을 위해서 그분이 하신 말씀과 행적을 따라서 살아가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교회이다. 애초에 만들어진 이유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함이었고 그분의 명으로 생겨났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세지를 온 세상 만방에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 말고 다른 이유는 없다. 오직 그 이유를 확장하기 위해서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그 근본 목적을 늘 살피고 점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교회가 길을 잃은 듯이 보일 때, 우리는 교회의 생성 이유를 올바로 상기하고 다시 그것에 집중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생겨나고 덩치가 커져버린 외적 공동체를 살리려고 고군분투하기 시작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신앙을 위해서 애써야 할 수많은 노력들을 엉뚱한 곳에 허비하기 시작하게 된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와 정 반대로 복음을 위해서라는 이유를 갖다 붙임으로써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있는 법이다. 즉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아 보이지만 실제로 나아가려는 내면의 방향성이 전혀 달라질 수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 일은 최종적으로는 공동체에서 드러나게 되지만 실제로는 한 개인에게서부터 시작되는 움직임들이 서로 모여 결국 공동체에서 드러나게 되는 일로 확산된다.

변화의 시작점은 거대 공동체가 아니다. 거대 공동체만큼 변화하기 어려운 것도 없다. 왜냐하면 거대 공동체 안에서는 개개인의 자유가 다들 숨겨져 있고 모든 것은 통계화되고 수치화되어 표현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변화점은 한 개인에게서 시작되어야 한다. 

한 개인의 자유의지가 모든 변화를 주도하게 되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도는 어마어마한 것이 된다. 바로 그분의 하느님에게로의 온전한 헌신이 모든 인간들에게 훌륭한 모범이 되고 시작점이 된 것이다. 어마어마한 핵분열이 하나의 충돌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우리 개개인의 변화는 공동체에 크나큰 결과물을 가져오게 된다.

투덜대지 말라.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 하느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일을 시작해야 한다. 투덜거림은 그리스도인의 본성과 전혀 상관 없는 일이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일을 시작해야 하는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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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들을 향한 악마의 공격에 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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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사제들의 위치를 잘 알아야 한다.
사제들이 하는 일은, 사람들을 '성화(聖化)'
즉,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가까이로 가게끔 도와주는 것이다.
악마들로서는 치명적일 수 밖에 없다.
'거룩한' 사제들은 손짓 한 번으로 사람들이 자신들이 축복 받았다고 느끼게끔 한다.
축복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제가 마음을 담아 전하는 강복의 위력은 한 사람의 하루를 밝힐 수 있다.
그 밖에도 사제가 거행하는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는
그 사효성(일어나는 일 만으로 이루어지는 효력) 자체 만으로 위대한 힘을 지닌다.
그렇기에 사제들은 보통 사람들의 배에 해당하는 악마들의 유혹의 대상이 된다.

악마가 할 최선의 작업은,
그 사제직의 성스러움을 제거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악마들이 하는 짓은
사람들이 그 사제의 인간됨을 보고
코웃음을 치게끔 만드는 일이 우선이다.
결국 그의 모든 사제직의 직무수행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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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에 대한 탐욕'이 될 수도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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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이성을 돌처럼 바라보고 돈을 하찮게 여기지만,
다른 한편으로 은근히 명예욕과 지배하려는 마음이 대단할 수 있으며,
누구는 돈이나 명예, 권력에는 아무 관심이 없지만 이성에 대한 자신의 욕구를 견디지 못할 수도 있다.
또 누구는 '나은 생활', '윤택함'에 관심을 갖고 재물의 종이 되어간다.

사제직은 '나약한 인간'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으로서
우리는 그 인간이 아니라 그가 지닌 사제직을 존경할 필요가 있다.

악마의 목적은 그 '인간의 나약성'을 교묘하게 유혹해서 끝까지 드러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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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 하느님을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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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상황 자체에서 우리는 여러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은 그 자체로 알기 힘든 분이 아닐까요? 아니면 우리 자체 안에 그분에 대해서 알기 힘든 어떤 모종의 시스템이 존재하는 건 아닐까요?

첫번째 의문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당신 자체가 알기 힘든 분이 아닌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일단 하느님은 ‘무한’한 분이시고 ‘영원’하신 분이시니 ‘유한’하고 ‘한계’가 있는 우리가 그분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분을 아예 전혀 알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당신과 닮은 속성이 있어서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분에 대해서 알아 나가고 배워 나갈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지만 그분을 아는 것은 가능하다’ 정도로 전제하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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