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체험적인 지식



제가 지금껏 선교사로서 또 곳곳을 돌아다니며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말씀 선포자로서 현장에서 느껴온 몇 가지를 여러분과 나누어 보겠습니다.

1. 사람들의 영적 갈증
사람들은 여전히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목마르지 않아서 아무것도 찾지 않거나 단순히 게으르고 무지해서 아무것도 찾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충분히 목마름을 느끼고 갈구하고 있지만 그것을 내어주는 손길이 부족해서 그 상태로 점점 메말라가고 있을 뿐입니다.

2. 복음의 기쁨
복음에 대한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복음, 즉 기쁜 소식은 말 그대로 복되고 기쁜 소식이어야 합니다. 이는 물론 받아들이는 대상자에게 따라 서로 달라지는 것이지만 먼저는 선포하는 이가 복음의 순수성과 핵심을 올바로 회복해야 합니다. 지금 교회 안에 퍼져 있는 여러가지 가르침은 사람들이 느끼기에 ’복음’, 즉 기쁜 소식이 아니라 ’의무적인 것’, ‘기피하고 싶은 것’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기쁨을 올바로 회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3. 부족한 자각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들이 책임이 없다고 느끼고 능력이 없다고 느낍니다. 즉, 복음을 알고 전하는 데에서 한걸음 물러서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특정 부류에게만 복음을 알고 전하라고 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을 알게 된 모든 이들에게 그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자리에서 복음 실천자, 복음 선포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각이 굉장히 부족합니다.

4. 능동적인 선포
선포는 더이상 수동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복음의 선포는 한 지점을 정해두고 기다리는 작업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본당 안에 모여 들어야만 복음 선포를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은 바뀌어야 합니다. 복음은 복음을 지닌 이가 다가서는 모든 곳에서 선포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호기심에 다가서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다가 복음에 저절로 관심을 가지게 되고 다가서는 시기는 이미 흘러가 버렸습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소통을 하기 위한 과학 기술은 늘어났지만 안타깝게도 영적인 면에서는 더욱 자신 안에 갇혀 살아가고 있고 수동적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가치는 보다 적극적으로 전해져야 합니다. 복음은 찾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제가 하는 모든 작업들(SNS, 라디오, 각종 특강 등등)은 바로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가치는 전혀 변질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것이 올바로 이해되지 못하고 인지되지 못하고 전해지지 못해서 정체되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복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또한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복음의 참된 빛을 회복한다고 해도 그것을 구체적으로 전하려는 노력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쉴 틈 없이 마을들을 돌아다니셨고 가르치셨습니다. 심지어는 당신의 식사 시간까지도 희생하시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종입니다. 그리고 종은 주인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부단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설령 그 복음을 전하는 일이 나의 휴식을 침해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댓글 쓰기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관계의 문제

고해소 안에서 마주하는 거의 모든 문제는 ‘관계’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만큼 관계가 소중하고 그 관계에서 문제가 일어난다는 말이기도 하겠지요. 이게 어떤 물건이라면 절대로 그 물건과의 관계를 가지고 오지는 않습니다. 물건은 필요할 때에는 쓰다가 필요가 없으면 버리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인간관계는 특히나 가족관계를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관계가 문제가 됩니다.

일방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관계는 모두 상호적인 것입니다. 부모와도 배우자와도 자녀와도 친구와도 모두 상호적인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이게 내가 잘한다고 무조건 잘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상대가 잘한다고 그대로 잘 되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관계는 상호적으로 신경써야 하고 가꾸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계약’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모든 관계 사이에 계약을 끼워두고 그 계약이 지켜지는 동안에는 관계가 유지되다가 계약이 깨어지고 나면 관계가 파괴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그들이 근간으로 삼는 계약관계는 이해관계에서 시작되고 그 이해관계를 가늠하는 핵심은 바로 나 자신의 이익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유익한가 아닌가, 나에게 필요한가 아닌가가 핵심이지요.

헌데 신앙인은 근본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모든 다른 관계를 구축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상대와의 계약이 파기되더라도 하느님 때문에 다시 그 상대에게 다가서야 하는 이들입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힘든 점이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아무리 필요가 없고 쓸모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한 번 노력해야 합니다.

고해소 안에 들어오는 이들은 자신에게 피로감을 안겨주는 관계, 혹은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는 관계 때문에 힘들어서 다가옵니다. 고해사제는 이 관계를 잘 점검해서 다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주고 그로 인해서 또다시 그들에게 피로감을 주거나 손해를 끼치는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쉬운 길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그냥 피곤한 관계는 …

속을 들여다보기

로봇에게 센서를 달아준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가 80년대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아무리 좋은 센서를 달아준다고 해 보아야 그 수준에 맞는 센서를 다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옛날 칼라 텔레비전으로 보는 수준의 화면을 인지하는 센서를 가지게 되겠지요.

만일 오늘날 로봇에게 최신의 센서를 달아준다면 그 로봇은 수만가지의 색상을 분별하고 세밀한 모습을 분별하는 센서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카메라 기술이 그때에 비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혼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분별력의 섬세함이 너무너무 뛰어났기 때문이었지요. 예수님은 그가 이미 드러내고 있는 수많은 것들을 바탕으로 그의 영혼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아니, 영혼을 당신의 영혼으로 바로 바라보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그분에게는 누가 따로 설명을 해 드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한 사람이 정말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믿음을 가진 척을 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사랑이 넘치고 내면이 침착하고 영원에 대한 관심사가 남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믿음을 지닌 사람은 반대로 사랑이 없어서 사랑을 흉내내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면이 불안정하고 언제나 위태로운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영원에 관심이 없어서 그것을 애써 흉내내어 보지만 결국 자신이 실제로 원하는 관심사가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에 우리가 집중하다보면 상대의 관심사가 드러나게 되고 그의 내면이 분별되게 됩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선한 사람인지 선을 흉내내는 사람인지가 드러나게 되고, 또 기본적으로 선하긴 하지만 어떤 나약함을 지니고 있으며 어떤 부분이 보완되어야 하는지도 드러납니다.

지혜를 차곡차곡 쌓아 나가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기꺼이 해 낼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으로 인해서 내면이 변해가게 되고 영적인 정밀도도 더해가게 됩니다. 그래서 유혹을 더 쉽게 피하게 되고 반대로 참되고 진실한 요소들은 그 …

영적 진보의 도식

선한 사람이 늘 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지요. 선하니까 그 선한 성정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늘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선하다는 것의 본질적인 의미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것이지 무턱대고 모든 것을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선한 사람은 바르고 그른 것을 가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선한 사람은 기본 성정이 선하긴 하지만 모든 것을 수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모든 것을 수용하지만 아닌 것에는 과감하게 아니라고도 표현하게 됩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은 하느님을 따라가면서 '십자가'라는 것을 배우게 되고 그래서 그의 내적 영역이 확장되고 넓어지면서 사랑이 더욱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악한 이도 받아들이는 여유를 지니게 됩니다. 그의 악한 성정과 악한 의도를 알면서도 그 악을 자신 안에서 녹이기 위해서 그 악을 수용하는 것이지요. 헌데 이 모습이 외부 사람들이 보면 정말 멍청해 보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모습이 됩니다.

도식화 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악을 저지르고 뉘우치지도 않는 사람
악을 저지르지만 뉘우치는 사람
악을 알아보고 저지르지 않지만 구체적인 선을 행하지도 않는 사람
선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지만 약하고 실수를 하는 사람
선을 실천하면서 약함을 극복하고 악을 분별하는 사람
선을 실천하면서 더 많은 선의 일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
선을 실천하면서 타인의 악을 분별하고 그 악을 자신 안에서 녹여내는 사람

물론 여러분의 이해를 위한 것이지 이것이 '공식'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도식화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물론 한 사람이 한 군데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오늘은 약하다가 내일은 선에 적극적일수 있고 또 다른 날은 유혹에 빠져 악을 저지르고나서 뉘우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추구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지금의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