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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아는가?




사람들의 질문 속에는 그들이 지향하는 바가 뚜렷하게 숨어 있습니다. 물건의 가격을 묻는 사람은 그것을 사고 싶은 의향을 이미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도 저도 관심도 없는데 공연히 엉뚱한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신이 산란한 사람이거나 의도적으로 주제를 흐리려는 사람입니다.

일상의 대화 안에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주로는 그 사람의 중심 생각이지요. 그가 주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즐기는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가 일상 대화 안에서 거의 드러납니다. 단 한 번도 생각지 않은 것을 대뜸 주제로 꺼내는 사람은 없는 법입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참으로 많은 대화를 나눕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나 자신의 영적 생활을 나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말 그에 대해서 나눌 이야기가 없어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걸까요?

음식 이야기 하나로 몇시간 동안을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정작 자기 자신의 참된 내면에 대해서 전혀 드러낼 것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의 내면은 음식에 대한 욕구 말고는 드러낼 것이 전혀 없는 것일까요? 아니면 무언가 존재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실제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 안에서 사 먹는 음식이나, 보아야 하는 영화 따위가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해도 그만이고 안해도 그만인 것들입니다. 우리가 힘들어하는 일들은 우리가 드러내기 꺼려하는 영역 안에 숨어 있습니다. 바로 그 부분이 우리의 영적 영역입니다. 인간의 소홀함과 오류가 쌓여 삶의 괴로움이 형성되는 부분이지요.

우리는 이런 숨어 있는 영역들을 서로 알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극히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주제들 뒤로 정말 자신들이 나누고 서로를 보듬어 안아야 할 부분들을 숨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드러내기 힘든 영역, 과연 우리는 누구와 그것을 나눌 수 있을까요? 우리의 관심사가 온통 잡다한 것들에 소비되고 있다면 그 누구도 참된 길을 찾아나설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솔직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참된 구원의 길이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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