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이끄는 복음의 말씀이 있고,
빛을 가장해서 사람을 기분좋게 만든 후에 결국은 어둠을 지향하게 의도하는 교묘한 거짓말이 있고,
듣는 것으로 사람을 기분나쁘게 만들고 내부로부터 악을 이끌어내려는 사악한 말이 있습니다.
복음은 그것을 작정하고 퍼뜨리는 이들에 의해서 퍼져 나갑니다. 성당 안에서 듣는다고 다 복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올바로 이해하고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에 의해서 비로소 전달되는 것입니다. 늘 다른 사람을 험담하는 사람이 주일에 정장을 차려 입고 나와서 미사 해설을 하고 독서를 한다고 그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복음을 모독하는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의 실제 삶의 모습을 아는 이들은 그가 나서서 하는 성당일을 보고는 역으로 성당에 오고 싶어지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이의 숫자는 실제로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자신이 선포하는 것을 살아가는 이들의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우리가 듣는 대부분의 말은 교묘한 거짓말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말들은 들을 때에는 우리의 귀를 기분좋게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그 궁극 지향점 자체가 하느님과 그분의 외아들을 향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지상의 괴로움을 없애 주겠다는 허황한 약속, 현세적 축복이 가득한 기적을 체험하게 해 주겠다는 말은 참된 복음이 아니라 교묘한 거짓말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분별력을 가동해서 그런 말을 전하는 이들의 거짓을 알아챌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비둘기처럼 순박하지만 말고 뱀처럼 영리하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묘한 거짓말을 하는 이들도 나쁜 이들이지만 그런 말들을 듣고 싶어하고 즐기는 사람들의 내면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소비자가 없으면 생산자가 없어질 테니까요. 하지만 그런 말들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는 동안 교묘한 거짓말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듯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욕구에 따라서 자신에게 득이 될 것 같은 스승을 따라 다닐 것입니다.
사악한 말은 듣는 그 자체로 분별이 됩니다. 왜냐하면 들으면 기분이 나빠지고 우리 안의 악이 활성화 되어서 복수심이 가동되고 우리가 죄를 짓도록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이런 내적인 충격에 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악한 이가 갑자기 내어 쏟는 사악함에 휘말리지 않도록 내면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애시당초 그런 자리에 동참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사람이 급격하게 흥분할 수 있는 자리, 흥청대는 술자리, 만취한 이들이 많은 곳을 피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모이기만 하면 다른 이들의 험담을 하는 모임, 비난과 빈정거림이 주도하는 모임에서 스스로를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말이라는 것은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동방박사처럼 복음의 빛을 찾아 떠나야 합니다. 교묘한 거짓말을 분별해 내고 사악한 말을 피하며 빛을 찾아 조심스럽게 길을 떠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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