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호수 위를 걸으시다

caminar sobre las aguas

혼돈 속에서 머무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느껴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사랑해야 하는 대상이고 그분을 올바로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혼돈이 없어진다는 사실에 대해서 제자들은 무지했습니다.

현대에도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자신의 삶을 혼돈 그 자체로 이끌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꾸 다툼이 일어나고 그것을 해결하겠다는 움직임이 또다른 다툼을 불러 일으키는 말 그대로 삶이 꼬여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중독 상태를 벗어나겠다고 다른 중독을 일으키기도 하고 쾌락을 추구하다가 돌이킬 수 없는 어둠에 빠져 버리기도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바로 맞바람을 맞으면서 호수에서 애를 써서 노를 젖는 제자들의 모습에 비길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일을 더욱 철두철미하게 함으로써, 즉 노를 열심히 저음으로써 이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예수님이 지나갑니다. 예수님은 정말 말도 안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바로 그 혼돈 위를 걷는 모습으로, 즉 혼돈 그 자체를 초월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흥미로운 것은 그들에게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곁을 지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에게 강압적으로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충분히 그분을 볼 수 있고 우리 측에서 그분을 부르도록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강압적으로 이루어지는 요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충분히 믿을 근거가 주변에 주어지지만 결국 나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는 충분히 혼동을 살아보았고 마음의 짐을 지고 살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것을 덜어줄 수 있는 충분히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존재로서 우리 곁을 자유롭게 지나가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분을 불러야 합니다.

하지만 제자들도 우리들도 안타깝게도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가오시는 예수님, 의로움, 선, 진리, 사랑, 평화이신 분을 혼돈 속에서 바라보면서 그분을 유령으로, 즉 두려움의 대상으로, 나의 혼돈을 더욱 가중시킬 것만 같은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종교적 외적 활동은 하지만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분의 진정한 가르침은 십자가로 느껴지고 부담스러움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활을 20년을 하고 30년을 해도 여전히 이기적이고 세상에 탐욕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껍데기를 지니고 살지만 실제로는 세상의 쾌락적 요소를 즐기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곧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용기는 무모함이 아닙니다. 용기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일이고 진리와 선과 사랑의 결심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두려움을 떨쳐야 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영혼을 상징하고 공동체를 상징하는 배에 오르자 바람이, 즉 혼돈이 멈추게 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수도 없이 일어나는 빵의 기적, 즉 성체의 신비를 매 주일마다 또 심지어는 매일마다 받아 모시면서도 그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입니다.

댓글

김아가다님의 메시지…
사랑해야 할 대상.....
하느님을 올바로 알아가는 20년이 되기를
하늘나라를 살아가는 삶이 될수 있기를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가 아닌
지금 여기에 살아서 하늘나라의 삶을 살아갈수 있기를.
나다, 두려워 하지 마라..
함께 해주시는 하느님과 함께 용기를 내어 살아내기를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