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 깊은 감명을 받을까요? 그리고 그에 멈추지 않고 실제로 '변화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화려한 언변의 말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말은 다양한 존재가 내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변화의 구체적인 욕구를 느끼게 되는 것은 다름아닌 한 사람의 실질적인 삶의 모범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따르고 있는 교회 안에서 바로 이런 움직임이 많아질 때에 비로소 사람들의 삶이 변화하게 됩니다. 그저 말뿐인 교회, 혹은 외적 겉치레에 신경쓰는 교회에서는 사람들의 삶이 변화하지 않습니다. 지금껏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자기네들끼리 모여서 서로를 칭송하고 공허한 친교로 서로 술잔이나 돌리고 있는 교회는 시간이 갈수록 있는 재원을 깎아먹고 쇠잔해 갈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만의 잔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구체적인 삶의 모범을 바라보면서 변화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마음이 맑은 이는 진리의 모범에 이끌리고, 반대로 어두움이 가득한 이는 그릇된 모범에 이끌리게 됩니다. 즉, 밝은 이들은 밝은 대상에 이끌리고 어둠이 가득한 이들은 어둠의 대상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거짓을 즐기지 않는 이들은 진실한 사람의 모범에 이끌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참되고 올바른 가치를 전하는 이들에게 감명을 받고 그들의 모범을 뒤따르게 됩니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계략을 걸어서 그를 넘어뜨리고 싶은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방식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음험하고 어두운 계략을 찾아 헤메고 다닙니다. 이는 마치 새들이 낮동안 활동하고 밤에는 잠을 자며 반대로 바퀴벌레는 습하고 어두운 음지를 좋아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변화'라는 것은 결국 한 사람의 내면에 설정된 가장 기초적인 방향에 근간을 둡니다. 빛으로 변화하고 싶은 이는 끊임없이 빛을 찾습니다. 이런 사람은 주변 환경이 아무리 암울해도 빛의 방향을 찾고 빛의 방식을 습득해 나갑니다. 반대로 어둠을 즐기는 이들은 가장 밝고 맑은 환경 속에 속해 있어도 언제나 어둠을 찾습니다. 아니 도리어 자신의 주변에 존재하는 빛을 꺼뜨리려고 애를 씁니다. 예수님 주변의 바리사이들이 바로 그런 자들이었지요.
사람은 '변화'를 향해 움직입니다. 그리고 변화하게 됩니다. 그러나 무엇을 향한 변화인지 올바로 고민해야 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1요한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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