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에 올바르게 몸담아 본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아니 여러번 반복해서 묻게 되는 질문입니다. 과연 이 방법 뿐일까요? 워낙에 효율성을 좋아하고 쉽고 편한 것을 찾는 우리들이라서 하느님의 방식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예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정말 그 뿐이었을까요? 그분의 십자가 말고는 다른 구원 방식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손가락 하나만 퉁기면 세상의 모든 악이 사라지는 식은 안되는 걸까요? 유다의 계획을 알고 있던 그분은 그를 사도단에서 일찍부터 제외시킬 수는 없던 것일까요?
인간의 지혜가 가 닿지 않는 그곳에 하느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하느님에게는 '시간의 구속'이 없기 때문에 그분은 영원을 바탕으로 일을 하십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됩니다. 자신에게 한정된 자원 밖에 없는 꼬마는 자신이 쥐고 있는 것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 부유한 아버지의 든든한 후원을 두고 있는 자녀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벗어난 범위의 일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인간적 한계 속에서 아버지에게 청을 드렸습니다. 제발 이 잔을 치워 달라고 말이죠. 하지만 하느님은 당신의 계획을 알고 계셨고 아들이 당신에게 의탁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의 여정을 우리는 오늘날 걷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만그만한 이들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양한 영적 강도와 색채를 지닌 사람들이 모여 삽니다. 추악한 악을 품고 음모를 짜는 이들부터 순진한 어린양 같은 이들까지 함께 모여 살아갑니다. 그래서 악의 결과인 고통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악인들이 자행하는 악의 결과를 맞닥뜨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탐욕과 이기심의 결과, 그들의 증오와 어둠의 결과를 선한 이들이 '나누어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이 방법 밖에는 없었습니다. 다른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면 하느님께서 그것을 보여주지 않으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는 오직 이 방법 뿐이었습니다. 남편의 악행을 참아 견대고, 세상의 악의 결탁 앞에서 의인은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살아갑니다. 이 방법 뿐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세상의 자녀들이 알 수 없는 가장 강력하고 최종적인 해결안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1코린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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