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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나쁜 일의 연관성

최근 글

살아난 아우 죽어가는 형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아우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죽어 있었다는 말일까요? 나아가서 여기 미사를 드리겠다고 모여 앉아 있는 우리는 과연 살아 있는 이들일까요? 아니면 죽어있는 이들일까요? 사람들은 육신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육신의 고통은 즉각적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내 발을 밟으면 그 즉시 그 아픔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증오한다고 해서 그 증오의 기운이 즉각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내 영혼이 탐욕과 이기심에 물들어간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즉각적인 아픔으로 다가오지도 않습니다. 신앙을 잃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당을 안나오면 도리어 몸이 편해집니다. 참된 신앙인이나 양심에 찔릴까 원래부터 신앙이 없던 이, 즉 성당에 그다지 나오고 싶지 않던 이들은 성당에 나오지 못하는 핑계가 생겼을 때에 오히려 잘 되었다고 좋아합니다. 이처럼 육신에 끼쳐지는 해악은 즉각 그 느낌을 알지만, 영혼에 끼쳐지는 해악은 둔감한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육신에 집착하고 영혼에 둔감하게 됩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육신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육신의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벌어지는 하나의 사건입니다. 선하게 살아도 악하게 살아도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진정한 의미의 죽음은 '영혼의 죽음'입니다. 영혼이 죽으면 안됩니다. 영혼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영혼이 살아있다는 것은 영혼이 생명이신 분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콘센트에 전원이 연결된 전자기기가 작동하는 것처럼 영원하신 분과 친교를 나누고 있는 영혼은 비로소 본래의 기능을 합니다. 영혼의 본래의 기능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놓여 있는 사람만이 참 되고 진실한 사...

하느님과 화해하다

우리는 서로의 관계 안에서 고심할 때가 많습니다.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서 부딪히고 싸우고 다투는 일이 흔합니다. 그리고는 '화해'를 고민합니다. 하지만 사실 모든 화해의 선결 작업은 하느님과의 화해입니다. 하느님과 화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그것은 우리의 영혼이 기본적으로 선을 회복한다는 뜻이고 진리와 영원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이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람 사이의 화해는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휴전일 뿐이고 내면에 불씨를 담아 놓은 채로 불이 꺼졌다고 스스로 위안삼는 것 뿐입니다. 언제고 다시 촉발될 싸움을 품에 안고 살아가는 셈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우리는 하느님과 올바로 화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우리의 내면 속에 진리와 선을 담을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무엇이 더 참된 것이며 무엇이 더 선한 것인지 알아서 그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내면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영원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을 품고 세상일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일을 바르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서로 싸우다가도 쉽게 화해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내면에 악을 오래 품을 능력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서로 부딪히지만 금세 화해합니다. 그들의 내면이 기본적으로 악에 심하게 물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다릅니다. 어른들은 악한 의도를 오랫동안 장기적으로 품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를 원한, 원망, 앙심이라고 부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다른 이를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그가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하느님,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의로워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의로움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의로우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의 의로움을 나누어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에 의로움을 추구하는 우리는 의로움을 추구하는 다른 이를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

영적 성장

만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음식이고 이스라엘이 노력하지 않고 얻은 음식입니다. 우리는 거저 얻는 것이 있는 동안에 힘을 길러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노력 없이 얻는 음식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음식이 그치고 나면 우리 스스로 양식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의 양식이 멈추었다는 이야기는 그들 스스로 양식을 마련할 만큼 성장했다는 의미입니다. 신앙 안에서 성장한다는 의미는 바로 '영혼의 성장'을 의미합니다. 몸은 양식을 먹고 자라고 영혼은 사랑을 먹고 자라는데 우리의 영혼 성장기 초반에 우리는 사랑을 받고 자랍니다. 지금 우리 성당에 나오는 예비자들이 그러합니다. 성당에 오면 간식도 주고, 교리도 가르쳐 주고, 내일은 성지 순례도 데려가 줍니다(강론하는 주일 예비자 성지순례 예정). 하지만 이런 보살핌이 영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곧 세례를 받고 나면 예비자 때에 필요했던 관심과 사랑이 멈추게 됩니다. 그때에는 스스로 신앙을 성장시켜 나가야 합니다. 누가 전화해 주지 않아도 스스로 미사를 챙겨 나와야 하고 스스로 필요한 신앙 성장의 기회를 찾아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이미 기성 신앙인인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찌보면 여전히 미숙한 신앙인들이 많으니 떠먹여줘야 겨우 먹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고해 성사도 판공 때가 되어 보라고 해야 보고, 미사도 의무라는 것을 알려줘야 겨우 오는 식입니다. 스스로 필요에 의해서 고해를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하고 주일 미사 외에 미사는 오면 큰일나는 식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교회의 성장 시기에는 별 상관이 없는데 교회의 위기가 닥쳐오면 당장 떠나버리는 것이 일상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누려 오던 것들이 메말라가면 영혼이 죽어버리고 냉담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은총이 내리는 동안, 우리에게 만나가 내리는 동안 스스로의 힘을 기르고 스스로 먹을 것을 찾는 신앙인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교회의 여러 봉사 기회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역량...

죄가 뭔지 알아야 없앨 수 있다

하느님을 찾는 것이 의로움이고 하느님 아닌 것을 찾는 것이 죄가 됩니다. 음식을 예를 들어봅시다. 좋은 음식이 있고 나쁜 음식이 있다는 것은 여러가지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맛으로 좋은 맛과 나쁜 맛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또 독성을 바탕으로 좋은 음식과 나쁜 음식을 구분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음식에 영성적 의미를 더할 수도 있습니다. 즉 하느님을 위해 음식을 먹는 사람과 하느님 아닌 다른 목적을 추구하며 음식을 먹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음식을 먹으면서 하느님께서 주신 나의 몸을 건강하게 보전하고 또 다른 사람들과의 친교를 나누며 나아가 필요한 이에게 음식을 제공하기도 하는 사람은 말 그대로 하느님을 위해서 음식을 먹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지나치게 음식을 먹어 건강을 상하게 한다거나 음식 자리에서 하느님을 욕되게 하고 또 누군가를 험담하며 이웃과의 관계를 단절 시킨다던지, 나아가 이웃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배만 불리려고 드는 사람이면 이는 하느님 아닌 것을 바탕으로 음식을 추구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모든 일에서 하느님을 찾는 이 기본적인 태도를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하느님께서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믿고 또 그분이 우리를 선으로 이끌고 계신다는 것을 믿어서 그걸 바탕으로 일상을 꾸려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이들은 뭔가 많은 성과를 통해서 타인에게 자신의 삶을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께서 허락한 이 생을 성실하고 책임감있게 살아갈 뿐입니다. 반대로 믿음이 없는 사람은 보여주기 위해서 삽니다. 그가 신앙인의 탈을 쓰고 있으면 기도도 보여주기 위해서 하고 미사조차도 보여주기 위해서 나올 뿐입니다. 사람들의 좋은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짓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런 이들은 불행합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갈수록 그들이 얻게 될 것은 사람들의 무관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노력하고 추구한 만큼 잃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불행해지고 그런 불행을 혼자만 지니고 있는게 너무 울화통이 터져서 다른 이...

주님의 노력

하느님이 하는 일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구원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두 영역에서 일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멸망을 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더욱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멸망을 피하는 데에 촛점이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의미를 갖습니다. 빛을 향해 나아가는 이에게 오히려 죽음은 기회입니다. 그들은 죽음을 향해 양 팔을 벌리고 삽니다. 하지만 어둠을 향해 내려가는 이들에게 죽음은 경고장이 됩니다. 죄지은 상태의 우리가 뉴스에서 사람들의 죽음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우리 내면에 있는 영혼은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라는 경고입니다. 나아가 하느님은 가능한 기회를 주는 분이지 부당한 분이 아닙니다. 당신은 언젠가는 열매맺지 않는 나무를 잘라 버릴 것입니다. 다만 그 기회를 최대한 늦추고 계십니다. 죄짓는 이들은 '이래도 아무 일도 없네?'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기회가 선물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에게 허락된 시간이 다 지나고 나면 결국 나무는 잘릴 것입니다. 물론 그 기회를 잘 이용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매년의 사순이 이렇게 지나갑니다. 신앙인에게는 얼마나 많은 기회가 선물되는 것인지 모릅니다. 모쪼록 그 기회를 잘 써서 빛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투덜거리는 이들

광야의 이스라엘은 영적 여정을 가는 이들에게 하나의 본보기가 됩니다. 그들처럼 우리도 이집트와 같은 세속성의 무게에 시달렸으며, 그들처럼 우리도 홍해 바다를 건넌 것처럼 세례를 통해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 왔습니다. 그들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셨습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광야에서 죽어 널브러졌습니다. 이 일은 우리를 위한 본보기로 우리는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이 한 일은 이렇게 요약됩니다. 1) 악을 탐냈다. 악을 탐냈다는 것을 그들이 무언가 어마어마하게 사악한 일을 저질렀다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그들은 평범했고 하느님의 만나를 먹고 있었고 날마다 구름기둥과 빛기둥의 안내를 받아 걸어다니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탐냈습니다. 몸은 모세를 따라 걸어다니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에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신자들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성당은 나오는데 사실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닌 자신의 탐욕스러움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게 뭐든 말입니다. 2) 투덜거리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투덜거림입니다. 그들은 기쁘게 생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았기에 하느님이 인도하는 여정이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공연히 이 길을 따라 나왔다면서 자신들을 압제하던 이집트의 삶을 그리워했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사람들은 차라리 세례를 받지 않았으면 주일 미사를 빠져도 마음의 부담도 없을 것이고 교회의 교리를 따르지 않아도 뭐라 할 사람이 없을 거라고 투덜댑니다. 이런 이들의 운명은 '파괴자의 손에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 경고가 되어 그대로 전해집니다. 모쪼록 스스로 서 있다고 착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