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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31주 홀수해 평일강론 모음

2017 11 5 주일
[() 연중 31주일]

사람이 하느님을 모시지 않고 자기 자신을 모시는 동안은 자기 자신이 가장 드러나 보이고 돋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자신을 최고의 가치로 만들기 위해서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 파생되는 것이 교만이고 허영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그런 사람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나타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마태 23,5-7) 2000 전의 말씀이지만 사실 오늘날 사람들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 교회 안에는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드높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히나 한국은 등급을 매기는 데에 특화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사람을 만나면 묻는 것이 그의나이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차이가 많이 나면 자동적으로 위계질서가 생기고 등급의 차이가 생겨나는 셈이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배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까? 저는 반대의 경우를 적잖이 보았습니다. 나이만 들었지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허황한 생각으로 가득한 어르신들을 많이 만나볼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제외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그의 실체를 충분히 있었습니다.

자신이 높아지려는 사람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로 다른 이에게 짐을 지우고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왕이 종이 하는 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왕은 근엄하게 왕좌에 앉아서 고급진 와인을 마시면서 종에게 명령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그저 겉으로 뭔가를 하는 드러내 보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그들은 나름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하늘나라를 상속받기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는 하느님이 주인이시니까요. 그들은 설령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곳을 견디기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에서는 자신들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니까요. 교회는 하늘나라를 반영해 내는 지상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가난한 사람, 무식한 사람, 미천한 신분의 사람들이 찾아와서 하느님에게 축복을 받고 드높은 자리로 격상됩니다. 반대로 스스로를 높은 자리에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2017 11 7 화요일
[() 연중 31주간 화요일]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사람은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다른 사람은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다. 다른 사람은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수가 없다오.’ 하였다. (루카 14,18-20)

잔치를 마련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와서 즐기기만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보다 잔치는 존재할 없을 것입니다. 모든 잔치는 주최자의 능력에 따라서 준비되는 것인데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잔치가 세상 어느 것의 기쁨보다 못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양해를 구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지점에서 사람들의 면모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분의 잔치의 기쁨도, 그분 자체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기쁨을 지니고 있었고 기쁨을 위해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밭과 방금 겨릿소와 장가를 즐기기 위해서 저마다의 길로 흩어집니다. 안에서 기쁨을 찾고자 하겠지요.

결국 그들은 잔치를 상실하고 맙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이 찾아다니던 것의 기쁨도 그쳐지고 말겠지요. 왜냐하면 하느님 외에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그들은 한없이 후회할 것입니다. 그러나 때는 상당히 늦어 있을 것입니다. 이미 하느님은 한길과 골목에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을 모조리 데려와서 당신의 나라를 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통에 정작 처음 초대받은 이들 가운데에서는아무도당신 나라의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하게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반대편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길에서 헤메이던 이들,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던 이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던 이들이 하늘 나라에 초대받아 들어오게 되어서 얼마만함 기쁨을 누리게 될까요? 우리가 기쁨을 상상할 있다면 지금 우리가 겪는 작은 수난은 얼마든지 참아 견딜 있게 것입니다.




2017 11 8 수요일
[() 연중 31주간 수요일]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버리지 않는 사람은 제자가 없다. (루카 14,33)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서 막연하게 생각하고 그분이 마치 모든 것을 허용한다는 듯이 간주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면서 심지어는 자신이 정말 악독한 일을 하고 있는데도하느님은 용서하실거야라고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물론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올바로 안다면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지려는 것이 개똥인 줄을 알면 냄새와 모양과 감촉 때문에 절대로 손을 뻗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개똥인 아닌지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짓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책임이 경감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충분한 분별력을 얻을 있었음에도 그것을 스스로 포기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외적인 요소들을 서로 비교하고 분석할 있습니다. 그래서 비싼 자동차가 비싼 것이며 자동차는 것인지를 압니다. 하지만 그들은 내적인 면모에서 같은 비교 분석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영적 게으름이 그것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버리지 않는 사람은 당신의 제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기에서 하느님과 거래를 시작합니다. ‘ 정도 버려줄테니 당신 고집을 꺾으시지요.’라고 하면서 자신의 몫을 남겨두려고 합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하느님의 생각보다 뛰어나다고 간주하는 셈이고 바로 교만으로 인해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도 결국 잃어버리게 것입니다.




2017 11 9 목요일
[()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이것들을 치워라.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온갖 세속적 욕망으로 가득차서 서로 경쟁하며 자신이 가진 것이 낫다고 자랑해대는 이들은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이것들을 치워라. 아버지의 집은 믿는 이들의 집이다. 하느님은 믿지도 않고 신뢰하지도 않으면서 입으로는 늘상 주님 주님 외쳐대는 그들의 위선과 가식에 지쳐버렸다. 그들은 사람들이 안에 썩어가는 시신이 들어있는지도 모르고 밟고 다니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

이것들을 치워라. 아버지의 집은 마음이 양선한 자들이 쉬어가는 곳이다. 온갖 사욕과 탐욕과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서로 분열을 일으키고 다투고 싸우는 이들, 하늘로부터 오는 참된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온통 분쟁과 헛된 언쟁에 마음쓰는 이들을 거룩한 곳에서 치워 버려라.


이것들을 치워라. 모조리 치워버려라. 그리고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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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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