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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3일 강론)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예수님은 음식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대로 먹을 것이 되어 오셨지요. 우리가 무언가를 먹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서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우리 입으로 들어오는 것들은 소화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육체로 재생산되게 됩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인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은 바로 음식의 형상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먹는 행위를 통해서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말은 우리가 섭취하는 그분의 몸과 피가 바로 우리 자신 안에서 소화되어 우리의 몸을 형성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의 부족한 이해가 드러납니다. , 우리는 입으로 받아 모시는 음식에 대한 외적인 차원은 분명하게 느낄 있지만 안타깝게도 거기에서 우리의 이해가 멈춰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손님이 오셨을 때에 잔과 접시를 깨끗이 닦아서 내어 놓을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 뿐일까요? 그것이 손님을 맞이하는 준비의 전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손님을 맞이하는 것은 단순히 잔과 접시, 혹은 의자나 식탁의 청결상태 만이 아닙니다. 손님을 맞이하는 우리 집안의 분위기도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신부님이 어떤 자매님의 집에 가정 방문을 갔는데 모든 것이 거의 완벽하게 깨끗하게 준비되어 있는 모습을 본다면 당연히 첫인상이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집안에 들어가서 마주하게 되는 집안 분위기가 있을 있습니다. 미묘하게 흐르는 집안 식구들 사이의 긴장관계,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듯한 분위기와 불쑥 튀어나오는 말들에서 쏟아져 나오는 서로에 대한 비난이 존재한다면 그만한 가시방석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무언가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인 준비만이 아니라 내적인 준비, 영적인 준비를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을 모신다는 것은 단순히 성체와 성혈을 모실 법적 준비(공복재, 중죄나 대죄의 고해 ) 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일 내면을 준비하고 있는가 하는 것도 포함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모시는 예수님의 몸과 피는 바로 우리 자신의 존재 자체로 변화하게 것입니다. 다만 잘못 먹은 음식은 전혀 소화되지 못하고 도리어 토해 내게 되는 것처럼 우리 역시도 예수님의 몸과 피를 그릇되이 모시면 그로 인해서 얻을 있는 은총이 전혀 우리에게 적용되지 못하고 낭비해 버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마지못하는 기분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받아오실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때에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이 궤도를 찾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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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들을 향한 악마의 공격에 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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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사제들의 위치를 잘 알아야 한다.
사제들이 하는 일은, 사람들을 '성화(聖化)'
즉,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가까이로 가게끔 도와주는 것이다.
악마들로서는 치명적일 수 밖에 없다.
'거룩한' 사제들은 손짓 한 번으로 사람들이 자신들이 축복 받았다고 느끼게끔 한다.
축복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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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도 사제가 거행하는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는
그 사효성(일어나는 일 만으로 이루어지는 효력) 자체 만으로 위대한 힘을 지닌다.
그렇기에 사제들은 보통 사람들의 배에 해당하는 악마들의 유혹의 대상이 된다.

악마가 할 최선의 작업은,
그 사제직의 성스러움을 제거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악마들이 하는 짓은
사람들이 그 사제의 인간됨을 보고
코웃음을 치게끔 만드는 일이 우선이다.
결국 그의 모든 사제직의 직무수행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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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에 대한 탐욕'이 될 수도 있으며,
'명예, 권력을 추구하는 마음'이 될 수도 있다.

누구는 이성을 돌처럼 바라보고 돈을 하찮게 여기지만,
다른 한편으로 은근히 명예욕과 지배하려는 마음이 대단할 수 있으며,
누구는 돈이나 명예, 권력에는 아무 관심이 없지만 이성에 대한 자신의 욕구를 견디지 못할 수도 있다.
또 누구는 '나은 생활', '윤택함'에 관심을 갖고 재물의 종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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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 인간이 아니라 그가 지닌 사제직을 존경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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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 하느님을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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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상황 자체에서 우리는 여러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은 그 자체로 알기 힘든 분이 아닐까요? 아니면 우리 자체 안에 그분에 대해서 알기 힘든 어떤 모종의 시스템이 존재하는 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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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면담의 구체적인 환경

영적 면담이라는 것은 일단은 서로 맞대면을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인간이 의사를 전달하는 데에는 오직 ‘언어’만이 그 수단이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대의 표정과 따스한 환대 등등 여러가지 면으로 서로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인터넷이나 전화로 상담을 하는 경우에는 많은 다른 인격적 부분들이 결여되기 때문에 면담의 방향이 엉뚱한 곳으로 치달을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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